id
stringlengths 1
7
| revid
stringlengths 1
8
| url
stringlengths 37
43
| title
stringlengths 1
182
| text
stringlengths 0
170k
|
---|---|---|---|---|
31812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29 | 클레멘타인 (영화) | 《클레멘타인》은 대한민국의 액션 영화이며, 2004년 5월에 개봉되었다. 김두영 감독이 맡은 작품이며 인기 할리우드 배우 스티븐 시걸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으나 형편없는 완성도와 어이없는 스토리로 흥행에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해당 영화에 투자까지 한 준 리는 영화의 처참한 실패 때문에 거액의 빚을 갚아야 했으며 그 탓인지 2002년 KBS 1TV 《제국의 아침》이후 한동안 드라마 활동이 뜸해졌다가 2007년 MBC 《아현동 마님》으로 안방극장 복귀를 했다.
이 영화의 흥행 실패 요인은 크게 세 가지이다. |
318130 | 3127104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30 | 클레멘타인 | 클레멘타인(Clementine)은 영어권의 여성 이름이다. 온후·관용을 의미하는 라틴어에 유래되었다. |
318131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31 | 모턴 | 모턴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
318136 | 66951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36 | 김희원 (배우) | 김희원(金熙元, 1971년 1월 10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다.
생애.
17년 동안 극단 생활을 했으나 연기에 대한 회의가 들었고, 10년 넘게 수입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약 2년 반 동안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하다가 페인트칠로 정착했다. 2000년 시드니 하계 올림픽 때 한국에서 같이 극단 생활했던 동료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공연차 방문했는데, 공연 무대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페인트칠 작업을 하고 있었던 그는, ‘내가 무슨 부귀영화 누리려고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연기해야겠다는 마음을 확인하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후 후배 배우 배성우의 권유로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임창정의 도움으로 《1번가의 기적》의 건달 김 부장 역할로 영화 배우로 데뷔하였다. |
318139 | 66951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39 | 피사로 | 피사로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
318141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41 | 서울메트로 3000호대 VVVF전동차 | |
318142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42 | 서울메트로 2000호대 MELCO전동차 | |
318145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45 | 서울메트로 2000호대 VVVF전동차 | |
318146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46 | 서울메트로 2000호대 GEC전동차 | |
318148 | 3232475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48 | 석관동 | 석관동(石串洞)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속한 행정동 및 법정동이다. 동쪽으로 중랑구 묵동, 서쪽으로 성북구 상월곡동, 남쪽으로 동대문구 이문동, 북쪽으로 성북구 장위동과 접하고 있다. 인접해 있는 천장산의 모양이 검정돌을 꽂아 놓은 것과 같다고 하여 돌곶이 마을이라고 부르던 것이 한자로 석관동(石串洞)이 되었다.
지하철 6호선 돌곶이역과 1, 6호선 석계역이 지나며, 조선 경종의 능인 의릉,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이 위치해 있다. |
318151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51 | 루소 (동음이의) | 루소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인명.
루소( 또는 )는 다음 인물을 가리킨다. |
31815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52 | 빅토리아 루이제 폰 프로이센 왕녀 | 프로이센의 공주 빅토리아 루이제 아델하이트 마틸데 샤를로테(, 1892년 9월 13일~1980년 12월 11일)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의 고명딸이며, 하노버 왕가의 수장이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었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부인이다.
생애.
1892년 9월 13일에 포츠담의 대리석 궁전에서 태어나, 10월 22일에 빅토리아 루이제라 명명되었다. 빅토리아 루이제라는 이름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프로이센의 루이제 왕비에서 유래한다. 1909년에 제2 근위 후사르 연대의 명예 연대장이 되었다.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포츠담의 신궁전에서 만나, 다음해인 1913년 5월 23일에 결혼했다. |
318153 | 73014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53 | 김형일 (배우) | 김형일(金炯逸, 1960년 12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생애.
1960년 12월 28일에 출생하여 서울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며,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1년부터 1984년까지 대한민국 육군 사병으로 복무하였다.
군복무하던 도중인 1982년 전쟁 영화 《아벤고 공수군단》에 보조 출연자로 연기에 입문했으며, 이후 군제대 후 1985년 연극 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1987년 CBS 기독교방송 공채 성우로 정식 데뷔하였다. 1989년 KBS 한국방송공사 13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하였고, 이듬해 1990년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신마적 엄동욱 역으로 영화배우로 데뷔하면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졌다.
1990년 《서울 뚝배기》로 첫 드라마 출연을 시작하였고, 드라마 《한명회》와 《왕과비》에서 홍윤성 역할을 맡았으며, 정치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김재규 역을 맡았다. 저음의 묵직한 음석으로 인해 많은 작품에서 장군 전문 배우로 출연하였다. 2008년 드라마 《너는 내 운명》에서 찰스 강 역으로 특별출연하였다. 2006년 KBS 시트콤 《웃는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육형일 역으로 본인 이름과 같은 고정 배역을 맡았다.
2000년 12월에 무용가 한복희와 결혼하였다. 2006년 4월 연예인 히말라야 아일랜드 파크 원정대 부대장, 2010년 5월 천안시 농특산물 공동브랜드 하늘그린 홍보대사를 맡았다. |
318155 | 5292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55 | 두계 이병도 | |
318156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56 | 페르미 | |
318157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57 | 층 | 층은 다음을 뜻한다. |
318158 | 17319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58 | 이은혜 (정치인) | 이은혜(異恩惠, 1902년 4월 21일 ~ 1980년 8월 23일)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교육자이다. 정치인 윤치영의 두 번째 부인이다. 1945년 9월 대한여자국민당(대한국민당의 전신)을 창당하였다. 이화학당 여교사, 대한국민당 부총재 등을 지냈다.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인 김병기의 외할머니이며 前 대한민국 대통령 해위 윤보선의 숙모이다. 독립운동가 철기 이범석과는 인척간이기도 하다. 종교는 개신교.
약력.
기독교 장로인 이서린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그 뒤 이화학당 여교사 등을 지냈다. 뒤에 본부인 이병영을 잃고 상처한 윤치영과 결혼하였다.
1945년 9월 18일 임영신 등의 주도로 대한여자국민당이 창당될 때 부당수가 되었다.
1945년 10월 16일 중국·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승만이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홀로 귀국하였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돈암장에 기거하였으며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가 되는 임영신과 함께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이승만을 도왔다.
기타.
교회 활동으로는 권사로 활동했다. 사후 그를 기념하여 남편 윤치영, 아들 윤인선, 며느리 노호경은 서울 덕수교회에 3500만원을 헌금하기도 했다. |
318163 | 33033626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63 | 김성배 (야구 선수) | 김성배(金成培, 1981년 1월 12일 ~ )는 전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사이드암 투수이다.
두산 베어스 시절.
199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두산 베어스의 2차 8순위(전체 61순위) 지명을 받았고 건국대학교 졸업 후 2003년에 입단하였다.
2010년 9월 7일 문학 SK전에서 1,805일 만에 승리 및 1,822일 만에 선발승을 거두었다.
상무 야구단 시절.
2007년에 입단하여 2008년에 군 복무를 마쳤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
시즌 후 두산 베어스의 보호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어 2011년 11월 22일 처음 실시된 2차 드래프트를 통해 롯데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 때마침 FA로 영입한 투수 정대현이 무릎 부상 재발로 수술을 받아 재활하게 되자, 그의 부상 공백을 잘 메우면서 롯데 자이언츠의 핵심 셋업맨으로 정착하게 되어 2차 드래프트의 모범 사례를 보여 주었다. 2013년에는 정대현, 김사율의 부진으로 인해 마무리로 전환했고, '1점차 세이브상황 리그 최다'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데뷔 후 첫 30세이브대를 기록했다.
두산 베어스 복귀.
2016년 7월 23일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던 두산 베어스는 롯데 자이언츠와 1:1 트레이드를 단행해, 우완 사이드암 투수인 그를 다시 두산 베어스로 복귀시키면서 오른손 옆구리 불펜진을 강화하는 효과를 꿰었다. 반대로 롯데 자이언츠는 내야수 김동한을 영입하였다.
2017년 11월 8일 두산에서 방출된 후 현역 은퇴를 선언했으며, 2018년 6월에 LBS라는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열었다.
별명.
달콤한 활약 덕분에 꿀이 들어 있는 성배라는 뜻으로 '꿀성배'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 좋은 피칭을 선보일 땐 '독이 든 성배'라고 불린다. |
318164 | 5292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64 | 승당 임영신 | |
318165 | 8259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65 | 오토 | 오토(auto 등)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
318166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66 | 니콜라우스 아우구스트 오토 | |
318167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67 |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 |
31816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68 | 12 Play | 《12 Play》는 R&B 가수 R. 켈리의 첫 번째 솔로 음반이다. R. 켈리는 1993년 가을에 이 음반을 냈다. R&B 음반업계와 팬들로부터 R&B 음악의 고전 명작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알 켈리가 그의 밴드 퍼블릭 어나운스먼트(Public Announcement)를 막 떠나 발표한 첫 번째 음반이었는데, 이 음반은 R&B 계에서의 그의 위치를 확고히 해주었다. 이 음반은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찬가인〈Bump n' Grind〉(미국 차트 1위), 〈Your Body's Calling〉(미국 차트 13위) 등을 수록하고 있다. 노골적인 가사를 담고 있는〈Sex Me, Pts. 1 & 2〉(미국 차트 20위) 도 이 음반에 들어 있는 곡 중 하나이다.
이 앨범은 알 켈리의 “12 Play” 제하의 TP 4부작 중 하나이다. 4부작은《TP-2.com 》(2000년) 《 》(2005년), 《》(2008년) 등으로 구성된다.
수록곡.
Sex Me.
〈Sex Me〉는 R. 켈리의 솔로 데뷔 앨범 12 Play 중 첫 싱글이다.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 20위까지 올랐다.
Bump n' Grind.
〈Bump n' Grind〉는 미국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에이스 오브 베이스의 〈더 사인〉을 누른 것이었다. 또한 〈Bump n' Grind〉는 핫 R&B(Hot R&B Songs) 차트에서는 12주간 1위를 기록하였다. 당시 사상 최장 기록이었다. 영국 차트에서는 8위를 기록하였다.
〈Bump n' Grind〉는 영화 《위드다웃 어 패들》 (2004년), 《더 웩크니스》 (2008년)에 삽입되었다. 게임 《그랜드 테프트 오토 IV》에는, 게임 상의 R&B 라디오 방송국인 바이브 98.8 방송국이 선곡하는 식으로 삽입되었다.
Your Body's Callin'.
〈Your Body's Callin'〉은 〈Bump n' Grind〉다음으로 발매된 싱글이었다. |
318171 | 1047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71 | 헌의왕 | |
318172 | 23147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72 | 순재 이공 | |
318174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74 | 파투 | |
318176 | 3332106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76 | 이한진 | 이한진(李翰珍, 1983년 12월 20일 ~ )은 전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투수이다.
선수 시절.
SK 와이번스 시절.
2006년에 입단하였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15년 11월 29일 본인의 요청으로 SK 와이번스에서 방출됐다. 프로 통산 성적은 84경기 1승 3패, 1세이브, 4점대 평균자책점이다.
하지만 새로 뛸 팀을 찾지 못했고, 2016년에 경찰 야구단의 코치 제의를 받아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메인 투수코치인 김경원의 보조 코치를 맡았다. |
318177 | 6563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77 | 제춘모 | 제춘모(諸春模, 1982년 4월 5일 ~ )는 전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투수이자, 현 KBO 리그 kt 위즈의 불펜코치이다.
선수 시절.
SK 와이번스 시절.
광주동성고등학교를 졸업 후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2002년에 입단했다. 입단 당시부터 윤길현, 채병용과 함께 '팀의 세 마리 용'으로 불리며 큰 기대를 모았다.
데뷔 시즌이었던 2002년에 30경기에 등판해 146이닝, 9승(모두 선발) 7패,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팀 내 최다 승인 10승(9선발승으로 전년도와 타이)을 올리며 팀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2003년 현대 유니콘스와의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구원 등판해 승리 투수가 됐다. 2004년에 어깨 부상으로 4승(모두 선발)을 기록한 뒤 2005년에 팔꿈치 수술을 받아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복무했고, 2008년 4월에 복귀했다.
2014년 10월 29일에 은퇴했다.
야구선수 은퇴 후.
2014년 12월 15일부터 2019년까지 SK 와이번스의 2군 투수코치로 활동하였다. 2022년부터 1군 불펜코치로 활동한다. |
318178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78 | 피방 | |
318184 | 1070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84 | 알렉스 라미레스 | 알렉산데르 라몬 라미레스(Alexander Ramon Ramirez, 1974년 10월 3일 ~ )는 베네수엘라 출신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전 야구 지도자이다. 라미 짱()의 애칭이나 홈런을 날린 후 벤치 앞에서 선보이는 퍼포먼스로 알려져 있었다.
2001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한 이래로 10년 이상에 걸쳐 일본 야구에서 활약했고,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시절의 2013년에는 일본 야구 통산 2000안타를 달성하며 외국인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명구회에 가입했다.
또한 2013년 2월부터 2014년 9월까지 일본 최초의 푸에르토리코 레스토랑을 도쿄 도내에서 경영했으며, 같은 이름("주니어"가 붙는)의 아들(소생이 아니라 의붓 아들)이 있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감독을 맡았다. 2018 시즌을 마친 후 일본으로 귀화했다.
인물.
프로 생활 초기.
1991년 7월 1일, 아마추어 자유 계약 선수 신분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계약을 맺고 프로에 입문했다. 이후 오랫동안 마이너 리그 생활을 하다가 1998년 9월 19일 메이저 리그 첫 경기를 갖는다. 2000년 7월 28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엔리케 윌슨과 함께 트레이드 되었다. 메이저 리그에서의 3년 동안 135경기에 출장하여 통산 2할 5푼 9리의 타율에 12개의 홈런, 48타점, 38득점, 2루타 17개, 3루타 3개, 도루 3개를 기록했다. 2000년 11월 1일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하여 일본 프로 야구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된다.
야쿠르트 시절.
2000년 야쿠르트 스왈로스(현재 팀명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 이후 팀의 중심 타선에서 클린업 히터 역할을 맡는다. 입단 첫 해 타율 2할 8푼에 29홈런, 88타점을 기록했으며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3년에 동료였던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자 4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해 타율 3할 3푼 3리, 40홈런, 124타점을 기록하여 타점왕, 홈런왕, 최다 안타, 베스트 나인 타이틀을 연거푸 획득했다.
2007년에 외국인 선수이자 우타자로는 센트럴 리그 사상 최초로 단일 시즌 최다 안타 기록(204개)을 세웠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구단과 라미레스 사이에 연봉 계약 형태에 대한 이견이 발생했기 때문에(라미레스는 다년 계약을 요구했으나 팀은 1년 계약, 연봉 4억 엔(추정)을 제의했다) 11월 29일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게 된다.
요미우리 시절.
2008년.
요미우리에 이적한 이듬해인 2008년에는 4번 타자로 활약했던 이승엽과 다카하시 요시노부의 부진에 의해 주로 4번 타자로 기용되었다. 작년에 높은 타율을 유지하면서 장타력도 발휘하는 등 125타점(리그 1위)을 포함하여 3할 1푼 9리의 타율(리그 6위), 45홈런(리그 2위)의 뛰어난 성적을 기록한다. 이후 퍼시픽 리그 우승 팀인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 두 개의 홈런을 기록했는데 그 중 하나는 끝내기 홈런이었다.
시즌 종료 후 로베르토 페타지니(2001년 센트럴 리그), 알렉스 카브레라(2002년 퍼시픽 리그) 이후 베네수엘라 국적 선수로는 세 번째로 리그 MVP를 차지했다. 2008년 시즌 종료와 함께 일본에서 총 8년을 뛰었기 때문에 자유 계약 선수 자격을 획득했다. 따라서 이후 그는 어떤 팀으로 이적하더라도 외국인 용병 인원 제한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2009년.
그 해 144경기를 모두 4번 타자의 자리를 차지해 작년과 마찬가지로 계속되는 맹활약을 보여주었다. 3할 대의 타율과 30개가 넘는 홈런, 그리고 100타점을 달성한 것 외에도 시즌 타율 3할 2리 2리를 기록하면서 자신에게 있어서 처음이 되는 수위 타자와 통산 3번째의 최다 안타를 획득했다. 팀의 3연패 달성에 큰 기여를 하면서 2년 연속으로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시즌 통해서 부진을 겪어본 적은 없었고 6월 이외의 월간 타율은 모두 3할 이상이었다. 요미우리에서 우타자의 수위타자 획득은 1971년 나가시마 시게오 이래 38년 만의 일이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경기를 관전하러 온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의 딸이 라미레스가 때린 파울볼에 맞아 다음날에 라미레스는 “미안해요”라고 새겨진 자신의 싸인 볼을 오가사와라에 건네주기도 했다.
2010년.
그 해 4월, 부진에 시달린 적이 없었던 과거 2년과는 달리 시즌 초에는 낮은 타율에 시달렸지만 그 중에서도 득점권에 대해서는 승부에 강한 타격을 보여주면서 홈런과 타점을 연달아 기록했다. 여름이 되면서 컨디션을 단번에 끌어올려 타율도 향상시키는 등 최종적으로 타율 3할 4리, 49홈런, 129타점으로 2관왕을 달성했다. 그러나 그 해에 수위타자를 차지한 아오키 노리치카(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즌 MVP였던 와다 가즈히로(주니치 드래건스), 시즌 최다 안타 부문에서 일본 프로 야구 신기록을 세운 맷 머턴(한신 타이거스) 등에게 밀리면서 베스트 나인에는 선정되지 못했다.
타격 2관왕의 타이틀을 획득하면서도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지 않았던 사례는 1960년 후지모토 가쓰미에 이어 두 번째다.
2011년.
5월 1일, 4번 타자로서의 416경기 연속 선발 출전 기록을 마쓰이 히데키의 기록(415경기)을 깨며 요미우리 구단 신기록을 달성했다. 그러나 7월 13일 한신전에서의 사구의 영향으로 다음날 7월 14일에 선발 명단에서 제외돼 조노 히사요시가 4번 타자로 선발 출전해 기록은 469경기로 중단되었다. 경기 도중 대타로 출전했기 때문에 연속 경기 출장은 계속되었지만 다음날 경기에서는 경기 도중의 출장도 없었기 때문에 연속 경기 출장은 985경기로 멈췄다. 이 기록은 외국인 선수로서는 역대 최장 기록이 되었다.
8월 5일, 3회초에 내야 안타를 때려내면서 일본 프로 야구 통산 1793개의 안타를 기록해 터피 로즈의 1792안타를 넘은 역대 외국인 선수의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경신했다. 시즌 성적은 타율(.278)이 요미우리 입단 이후 처음으로 3할 대를 넘기지 못했고, 타점(73)도 연속 100타점 기록이 8년 만에 멈추면서 일본 진출 이후 낮은 기록이 되었다. 홈런(23)도 역시 일본 진출 이후 최저 기록을 남기는 등 타격 세 부문에서 모두 일본 진출 이후 가장 낮았다. 단, 홈런 개수는 리그 2위이다. 이것은 그 해에 새로 도입된 공인구(일명 통일구)의 영향으로 센트럴 리그의 모든 선수들이 홈런 개수도 감소되었기 때문에 홈런 개수에 관해서 결코 부진이라고는 말할 수 있는 숫자는 아니었다(최다 홈런은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의 31개). 지휘관의 기용면을 배려해 계약 마지막 연도가 되는 그 해에는 10월 31일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가 종료된 후 요미우리를 퇴단하겠다고 밝혔다.
DeNA 시절.
2012년.
요미우리를 퇴단한 이후인 12월 8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가 라미레스의 영입을 발표하여 그 후 입단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듬해 2012년 7월 5일에는 미일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고 같은 달 14일에는 외국인 선수로서의 최고 기록이 되는 12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2012년 7월에는 DeNA 이적 후 처음으로 통산 9번째의 월간 MVP를 수상했는데 3개 구단에서 월간 MVP를 수상하는 것은 사상 최초다.
2013년.
토니 블랑코의 입단에 의하여 5번 타선에 배치되며 4월 6일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6회초 이시카와 마사노리로부터 좌측 방향에 탄알 라이너로 뛰어드는 홈런을 날려 외국인 선수 범위에서 입단한 선수로는 사상 최초의 일본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다. 하지만 요미우리 퇴단의 요인이 된 수비 문제가 두드러지고 온 데, 특히 2000안타를 달성하고부터는 타격 면에서도 활력이 없자 4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을 마지막으로 스타팅 멤버에서 제외됐고 그 다음은 대타, 인터 리그에서 지명 타자로 출전했지만, 대타에는 낯선 것도 있고 결과를 남기지 못해, 6월 2일 닛폰햄 파이터스전에서 홈런을 때린 것을 마지막으로 22타석 연속 범퇴로 전반기 종료 후 7월 18일에 일본 야구생활 13년 만에 최초로 2군으로 강등되었다. 9월 27일 전력외 통보를 받고 있었던 것이 알려졌고, 10월 2일 구단 측이 2014년 시즌은 계약하지 않는 것을 공식 발표했다.
독립 리그 시절.
DeNA에서 전력외 통보를 받은 후에도 일본 프로 야구의 다른 구단에서 선수 생활을 계속하는 것을 희망했다. 좋아하는 탄산 음료를 끊는 등 예년 이상으로 절제와 자체 교육에 노력함으로써 다른 구단의 제안에 대비하고 있었다. 12월에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가 수비에 띄지 않는 지명 타자 요원으로 라미레스의 획득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일부 보도했지만 획득에는 이르지 않았다.
2014년 2월 13일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팀인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가 라미레즈를 타격 코치 겸임의 외야수로 입단하는 것을 발표했다. 등번호는 야쿠르트, DeNA시절과 같은 3번으로 배정되었다. 또한 타격 코치 비용을 포함한 추정 연봉은 요미우리 시절의 최고 금액 (5억 엔)의 100분의 1에 해당하는 500만 엔 (선수로 월급은 리그 규정 상한액의 40만 엔을 적용)이었다. 또한 라미레스는 일본 프로 야구 복귀 의향이 강하기 때문에 군마와의 계약은 "시즌 도중에 일본 프로 야구 구단에서 (라미레스) 획득이 타진된 경우에는 계약을 해제 할 수 있다"는 취지의 부대 조항 이 곁들여진 계약을 했다 (덧붙여 일본 프로 야구의 지배하 선수 등록 신규 획득 가능 기간은 7월 31일 까지이다).
입단 한 군마는 4번 · 지명 타자로서 5번 프란시스코 카라바이요와 함께 강력한 클린업을 형성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또 다시 세이부가 획득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되었지만 계약은 보류되었다. 6월 23일에 구단이 라미레스의 긴급 귀국을 발표, 귀국하게 된 경위는 "가족의 병 요양을 보살피기 위해"였다. 이후 팀에 다시 합류해 7월 11일 경기에 한번 복귀 했지만 비슷한 이유로 9월 4일에 구단이 두 번째 긴급 귀국을 발표했다. 두 번째 귀국 후에는 복귀하지 않고 시즌을 마쳤다. 2014년 군마에서의 성적은 45경기에 출장해 타율 0.305, 7홈런, 38타점이었다.
은퇴.
10월 14일, 구단을 통해 은퇴를 밝혔다. 그러던 2015년 시즌 후 나카하타 기요시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사임하자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기타 사항.
홈런 퍼포먼스.
홈런을 치거나 경기 종료 후 히어로 인터뷰를 할 때 자신만의 퍼포먼스를 구사한다. 홈런을 친 후 어웨이 경기에서는 단독으로, 홈 경기에서는 팀의 마스코트 캐릭터(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츠바쿠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자빗토)와 함께하는 액션을 보여준다. 일본 진출 후 매년 액션 형태에 변화를 주고 있으며, 일본 코미디언들의 연기를 퍼포먼스의 출처로 삼고 있다. 이후 구단이 직접 퍼포먼스의 아이디어를 야구팬들로부터 모집하는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으며, 유명인들이 홍보 목적으로 자신들의 퍼포먼스 차용을 직접 요청하는 경우도 있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대 후루타 아쓰야와 와타라이 히로부미에게 지도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퍼포먼스의 기본 형태는 몇 개의 퍼포먼스를 조합(각 퍼포먼스는 각각 다른 코미디언의 것이다)하여 연속으로 보여준 뒤 화면 옆으로 퇴장하는 형식이다. 일본 진출 초기 2001 ~ 2002 시즌에는 1개의 퍼포먼스만 구사했으나, 이후 2 ~ 4개를 연속으로 조합하는 형태로 진화시켰다. 2008시즌 요미우리로 온 뒤에는 상대 팀에게 지고 있을 때와 이기고 있을 때의 퍼포먼스를 따로 만들었다.
자서전 출간.
2009년 8월에 자신이 일본 프로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경험담을 기록한 ‘일본에서 성공하는 방법’에 관한 책을 출간했고 일본에서 일본 국적이 아닌 외국인 선수가 책을 내는 것은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라미레스는 프로 은퇴 후 일본에서 야구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현역 은퇴 후 활동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상세 정보.
개인 기록.
이하 기록들은 일본에서의 기록만을 다루고 있으며, MLB의 기록은 합산하지 않았다.
연봉 변화.
메이저 리그 시대.
연도: 연봉(달러) (변동+/-)
일본 프로 야구 시대.
연도: 연봉(엔) (변동+/-) |
31818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88 | 장요령 | 전량 애공 장요령(前涼 哀公 張耀靈, 343년 ~ 355년, 재위 : 353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제6대의 국왕이다. 시호는 애공(哀公)이다.
생애.
장요령은 장중화(張重華)의 아들로 343년에 태어났다. 353년에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10세의 장요령이 태자가 되었으며 곧이어 장중화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장중화의 서형(序兄)인 장조(張祚)가 장중화의 유언을 조작하여 후견인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장조는 곧 장요령을 폐위하여 양녕후(凉寧候)로 삼았다.
355년에 장관(張瓘)이 장요령을 복위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장조에게 살해당했고 시체는 모래 구덩이에 매장당했다. 시호는 애공(哀公)이라 하였다. |
318189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89 | 요한 슈트라우스 |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는 세 명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이름이다. |
318191 | 65024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91 | 요한 슈트라우스 1세 | 요한 슈트라우스 1세(, 1804년 3월 14일 ~ 1849년 9월 25일)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왈츠의 왕'으로 불리는 같은 이름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다.
1819년 런너와 4중주단을 만들었으나, 1825년에는 독자적 악단을 창설하고, 다음해에 최초의 왈츠를 발표하였다. 1833년, 1837년의 유럽여행에서 이름을 알렸다. 빈 풍의 왈츠 연주양식을 개척하여 폴카나 카드릴도 빈 적인 세련된 감각의 작품으로 만들었다. <안넨 폴카>, <라데츠키 행진곡> 등 외에 많은 춤곡을 작곡하였다. 빈풍의 춤곡의 기초를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한 느낌을 주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도 높은 예술성을 지닌 작품이 그와 그의 아들인 요한·요셉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아들들에게 음악을 하지 못하게 했지만, 장남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그를 능가하는 왈츠 작곡가로 성장했다. 이에 그는 분노했고 말년에는 자신의 아들과 음악으로 경쟁을 해야만 했다.
1849년 9월 25일, 비엔나에서 연쇄상구균 감염에 의한 성홍열로 사망했다. |
318199 | 2216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199 | 국립공주박물관 | 국립공주박물관(國立公州博物館)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속기관이다. 1975년 8월 20일 발족하였으며, 충청남도 공주시 관광단지길 34에 위치하고 있다. 관장은 학예연구관으로 보한다.
백제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1934년에 만들어진 공주고적보존회를 모태로 출범하였다. 1940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공주분관으로 개관하였고, 해방 후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2004년 현재의 박물관으로 신축하여 개관하였다.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으며 무료 관람이라도 관람질서 유지 및 이용객 안전 등을 위해 '무료 관람권'을 발행한다. 따라서 표 받는 곳에서 무료 관람권을 발급받아 입장해야 한다. 단, 기획전시는 경우에 따라 유료일 수 있다.
소장품.
2016년 12월 31일 기준 소장품 현황은 다음과 같다. |
318203 | 715251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03 | 헨리 데이비드 소로 |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년 7월 12일 ~ 1862년 5월 6일)는 미국의 철학자·시인·수필가이다.
생애.
1817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에서 태어나 1862년 미국 콩코드에서 사망했다. 하버드 대학 졸업 후 가업인 연필 제조업, 교사, 측량 업무 등에 종사했지만 평생 일정한 직업에 정착하지 않고 곧 학업에 매진했다. '자연'의 저자인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 등과 친분을 맺었다.
자비 출판한 첫 작품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A Week on the Concord and Merrimack Rivers", 1849년)은 젊어서 세상을 떠난 형과 선상 여행을 정리한 수필로 당시의 사회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표작 《월든 - 숲속의 생활》("Walden", 1854년)은 2년 2개월에 걸친 숲에서 혼자 기록을 정리한 것이며, 그 사상은 이후 시대의 시인과 작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소로우의 사후 《메인의 숲》("The Maine Woods", 1864년)과 《케이프 콧》("Cape Cod", 1865년) 등의 여행기와 자연을 쓴 에세이, 일기, 서간집 등 수많은 작품이 출판되었다. 소로우의 작품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주제로 한 것이 많고, 자연 문학(Nature writing)의 계보에 자리매김 된다.
그의 일생은 물욕과 인습의 사회 및 국가에 항거해서 자연과 인생의 진실에 관한 파악에 바쳐진 과감하고 성스러운 실험의 연속이었다.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항의하기 위해 홀로 월든의 숲에서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기도 했으며, 인두세 납부 거부로 투옥도 당했고, 후에는 노예 해방 운동에 헌신하였다. 그의 그러한 정신은 '시민 불복종'으로 이어진 마하트마 간디의 인도독립 운동과 킹 목사의 시민권 운동 등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에머슨과 함께 위대한 초월주의 철학자이며 미국 르네상스의 원천이었다. 그는 자연과학자이기도 하며 주요 저서로는 《월든》 《시민 불복종》등이 있다.
주요 저작물.
한편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는 1948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저서 월든을 이은 월든 투(Walden Two)를 저술한바있다. |
318204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04 | 소로 | |
318205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05 | 보르헤스 | |
318206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06 | 아퀴나스 | |
318207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07 | 휘트먼 | |
318208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08 | 에머슨 | |
318209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09 | 배비지 | |
318210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0 | 디킨스 | |
318212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2 | 프레슬리 | |
318213 | 750284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3 | 대한광복군 정부 | 대한광복군 정부(大韓光復軍政府)는 1914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설립된 한국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 군정부(軍政府)이자 망명 정부이다. 1914년 '연해주 이민 50주년'에 맞추어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등 권업회의 핵심 회원들이 주도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조직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 7일 권업회와 대한광복군 정부는 러시아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대한광복군 정부의 핵심 인력들은 이후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직후인 3월 17일 연해주에서 수립된 대한국민의회 정부를 수립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고, 이후 9월 11일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배경.
1911년 연해주에서 이상설을 초대 의사부 의장으로 하는 권업회라는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었다. 1913년에는 사관학교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위한 군간부들을 양성하였다.
군정부 수립.
이상설을 비롯한 이동휘·이동녕·이종호·정재관 등 권업회의 핵심 회원들이 주도하여 중국과 러시아에서 독립운동 세력들을 규합, '연해주 이민 50주년'에 맞추어 1914년, 블라디보스톡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건립하였다.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선출, 국내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독립전쟁을 수행할 병사를 훈련시켜 무장 병력 약 3만 명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부 산하로 편성된 광복군 규모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ㅡㅡ 1914년 대한광복군 정부가
러시아 지역에서 결성되는걸 전달받은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은 그해 권업신문과
권업회로 접근후 사진엽서 제작을 하며
밀정행위를 하고 그 소식을 일본은 첩보로
러시아로 전달하여 그로인해
광복군 정부 및 권업회 신문 모조리
폐간및 와해함
즉 안정근 친일 매국노가 접근하여
정보를 누설하게 됨.
사진제공은 일본.
막상 보훈처 관계자는 사진 입수출처는 밝히지 않음. 現 보훈처 친일세력이라는 정설
해체.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러시아가 전시 체제를 확립하고 노일동맹이 성립됨에 따라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받아 광복군정부는 그 해 9월에 그 모체인 권업회와 함께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 운동이 벌어지자 권업회와 대한광복군 정부의 핵심 인력들이 주도하여, 3월 17일 러시아 연해주에 대한국민의회라는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
ㅡ
원래 러시아 연해주가 독립운동의 본거지
막상 러일 밀약 및 상해 중국 프랑스 조계지로 미국 선교사와 미국의 지원을 받고
김구와 이승만은 상해 거점.
그후 대한국민의회 초대 손병희 대통령인데
해산후 상해 이승만 김구 임시정부 로
모조리 흡수.
손병희 = 천도교
이승만과 김구 = 개신교 예수종교
그래서 대통령이 개천절 불참석 한국
모조리 남한 정부가 독립역사 왜곡하고
교육화. |
318214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4 | 대한광복군정부 | |
318215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5 | 기번 | 기번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
318216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6 | 흄 | 흄은 다음 뜻으로 쓰인다. |
318217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7 | 버크 | 버크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
318218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8 | 테레사 | 테레사(Theresa)는 다음을 가리킨다. |
318219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19 | 월든 | 《월든》(Walden, or Life in the Woods)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대표적 수필집이다. 그는 1845년에서 1847년까지 물욕·인습의 사회와 인연을 끊고, 월든의 숲속에서 살면서 홀로 철저하고 청순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며 자연과 인생을 직시했다. 이 책은 그 생활기록으로서 그의 인간과 사상의 정수를 엿볼 수 있다. 문체 또한 절묘하여 미국 수필문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애독되며 특히 톨스토이와 간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외부 링크.
관련 오디오 |
31822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0 | W. H. 오든 | 위스턴 휴 오든(Wystan Hugh Auden, 1907년 2월 21일 ~ 1973년 9월 29일)은 영국의 시인이다.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 후 시민권을 얻는다. T. S. 엘리엇이 대표하는 1920년대의 정신에 반기를 들어 마르크시즘의 문제를 시 가운데 넣어서 와 스티븐 스펜더 등과 함께 신풍을 영국시단에 일으킨다. 이른바 '오든 그룹'의 지도적 존재이며 임상의(臨床醫)와 같이 병든 사회를 정신분석과 사회의식을 합친 수법으로 파헤쳤다. 말년에는 앵그리칸(Anglican) 종교에 기울어 인간존재를 '사랑'의 면에서 고찰하는 것과 같은 시를 썼으며, <전시집(全詩集)> 기타 많은 작품이 있다. |
318221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1 | 위스턴 휴 오든 | |
318222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2 | 오든 | 오든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
31822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3 | 엘리엇 | 엘리엇(Elliott, Elliot, Eliot, Eliott, Elyot)은 다음을 가리킨다. |
318224 | 2216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4 | 더글러스 | 더글러스는 영어의 고유명사이다. |
318225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5 | 더글라스 | |
318226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6 | 입센 | |
318227 | 8259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7 | 스콧 | 스콧() 또는 스캇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
318229 | 3302822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29 | 윌리엄 워즈워스 |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년 4월 7일 ~ 1850년 4월 23일)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함께 쓴 《서정 담시집》으로 영문학에 있어 낭만주의를 개창하는데 기여한 영국의 중요한 낭만주의 시인이다.
워즈워스의 걸작을 고르자면, 그가 수차례 수정하고 덧붙인, 자신의 유년시절에 관한 반자전적인 시집인 《서곡》이 대체로 거론된다. 이 시집은 “콜리지에게 바치는 시”로 일반적으로 알려지기 전, 워즈워스가 죽은 해에 아내가 제목을 짓고 출판했다. 워즈워스는 1843년부터 흉막염으로 사망한 1850년 4월 23일까지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다.
워즈워스는 1770년 잉글랜드 호수 지방의 아름다운 코커머스에서 다섯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1778년 어머니의 사망과 함께, 아버지는 그를 학교로 보내지만, 법률가였던 아버지도 1783년에 세상을 떠난다.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내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이 그의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자라, 후에 전원시를 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787년 워즈워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한다. 1790년 프랑스로 건너가 프랑스 혁명의 열광 속에서 혁명을 옹호했지만, 후년은 보수적으로 기울어져 갔다. 워즈워스는 프랑스 여자인 아네트 발롱과 사랑에 빠져 1792년에 딸을 출산하지만,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혼자 영국에 귀국한다.
워즈워스는 1797년에 콜리지와 사귀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같은 해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콜리지네 집 근처로 이사한다. 이듬해 두 시인은 공동 시집 《서정 담시집》을 발표하여 영국 낭만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1798년에서 1799년 사이 겨울, 워즈워스는 도로시와 함께 독일을 여행하면서 고독과 정신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서곡》이라는 제목의 자전적 작품과 《루시 시편》같은 그의 대표작들을 쓰기 시작한다. 영국에 귀국한 워즈워스는 호수 지방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그곳은 바로 시인 로버트 사우디의 집 근처였다. 그리하여 워즈워스, 사우지, 콜리지는 "호수 시인"들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워즈워스가 쓴 시의 주제는 주로 죽음과 이별, 인내와 슬픔에 관한 것이었다. 1802년 아네트의 딸 카롤린을 만나기 위해 워즈워스는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프랑스를 여행한다.
워즈워스는 자연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깊이 관찰하고 사랑과 고요함을 노래하여 영국의 낭만주의를 대표했다. 그는 또한 1843년 영국의 계관 시인이 되는 영광을 누렸다. 워즈워스의 작품으로 시집 《서정 담시집》, 《루시 시편》, 《서곡》, 《대륙 여행의 추억》 등이 있다.
생애.
유년시절.
윌리엄 워즈워스는 1770년 4월 7일 호수 지방이라고도 알려진 북서부 잉글랜드의 경치 좋은 지역 중 하나인 컴벌랜드 코커머스에 위치한 지금의 워즈워스 하우스에서 존 워즈워스와 앤 쿡슨의 다섯 자식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윌리엄이 일생에 걸쳐 가장 가깝게 지낸 누이로, 시인이며 일기작가였던 도로시 워즈워스는 그가 태어난 다음 해에 태어났으며, 같은 날 함께 세례를 받았다.
나머지 세 명의 형제들로는 후에 변호사가 되는 장남 리처드, 도로시 다음으로 태어난 네 번째 자식으로 훗날 선박 ‘얼 오브 애버거베니(Earl of Abergavenny)’의 선장으로 1805년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서 난파 사고를 당해서 사망한 존, 나중에 교회에 들어가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이 되는 막내 크리스토퍼가 있었다. 워즈워스의 아버지는 초대 론즈데일 백작 제임스 로우더의 법정 대리인이었으며, 백작과의 연분으로 작은 마을의 저택에서 살았다. 그가 일 때문에 자주 집에 들어오지 못한 고로, 어린 윌리엄을 비롯한 자식들은 아버지와 서먹서먹했으며 1783년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윌리엄에게 독서하길 권하였고 특히 윌리엄에게 밀턴, 세익스피어, 스펜서의 시를 기억하게끔 해주었으며, 윌리엄은 아버지의 서재를 쓰는 것 역시 허락받았다. 윌리엄은 컴벌랜드 펜리스에 있는 외조부모 댁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 곳에 살던 외조부모나 삼촌하고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외가 친척들과의 불화는 윌리엄에게 자살을 생각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윌리엄은 어머니로부터 읽는 법을 배웠으며, 처음에는 코커머스의 그닥 좋지 않은 작은 학교에 다니다가, 상류층 자녀들을 위한 펜리스의 학교로 전학을 갔고, 그곳에서 윌리엄은 학생들에게 부활절, 오월제(May Day)와 팬케이크 데이(Shrove Tuesday)같은 축제를 통해 공부와 지역의 전통을 알려주려 노력한 앤 버케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윌리엄은 성경과 스펙테이터(Spectator)를 통해 교육을 받았으나 그 이외로는 배우지 못했다. 윌리엄은 바로 펜리스의 학교에서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될 메리와 허치슨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윌리엄의 어머니가 사망한 1778년, 아버지는 윌리엄을 랭카셔(현재의 컴브리아)의 호크셰드 그래머 스쿨에 보냈고, 도로시는 요크셔의 친척과 함께 살도록 보냈다. 도로시와 윌리엄은 9년동안 만나지 못했다.
윌리엄은 1787년 <더 유러피언 매거진>에 소네트를 게재하면서 작가로 등단했다. 같은 해 그는 케임브리지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다니기 시작했고, 1791년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윌리엄은 캐임브리지 첫 재학 시절 여름방학 두 차례에 호크셰드로 돌아갔고 그 이후로는 방학 때 보통 도보여행을 하며 미려한 경관으로 유명한 곳들을 다녔다. 윌리엄은 1790년 유럽으로 도보여행을 떠나 알프스 산맥과 그 주변의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지역을 둘러보았다.
아네트 발롱과의 관계.
1791년 11월, 워즈워스는 혁명기의 프랑스에 방문했으며 공화파 운동에 매료되었다. 워즈워스는 그곳에서 프랑스 여자 아네트 발롱과 사랑에 빠지고, 결국 아네트는 1792년 워즈워스의 딸 카롤린을 낳는다. 금전 문제와 더불어 긴박하던 영불관계는 워즈워스를 다음 해에 혼자 영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것과 그 뒤로 보인 행동들은 워즈워스가 아네트와 진정 결혼하고자 했는지 의문을 불러왔으나, 그는 이후로 아네트와 그녀의 딸을 최선을 다해 도와줬다.
워즈워스는 공포의 시대로 인하여 프랑스 혁명에서 심한 환멸을 느꼈으며, 영국과 프랑스간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게 된 고로 그는 몇 년간 아네트와 자신의 딸을 볼 수 없었다. 아미앵 조약으로 프랑스로 가는 것이 마침내 허용되자 1802년 워즈워스와 누이 도로시는 칼레에서 아네트와 카롤린을 만나러 갔다. 워즈워스는 둘을 만나러 가면서 아네트에게 자신과 메리 허치슨이 곧 결혼한다는 것을 말해주고자 했다. 워즈워스는 이전까지 한번도 보지 못한 아홉 살 배기의 딸 카롤린을 만나서 딸과 바닷가를 걷던 것을 회상한 <It is a beauteous evening, calm and free>라는 소네트를 썼다. 메리는 워즈워스가 카롤린에게 더 잘해줬어야 했다고 걱정했다. 1816년 딸 카롤린이 결혼하자 워즈워스는 딸에게 1년에 30 파운드(2000년도 기준으로 환산하면 1360 파운드)씩을 주었는데, 1835년까지 계속 주다가 그 후로는 원금 지불로 대체했다.
첫 출판과 서정 담시집.
1793년은 워즈워스의 <An Evening Walk>와 <Descriptive Sketches>로 묶인 첫 시집이 간행된 해이다. 1795년 워즈워스는 레슬리 캘버트로부터 900파운드를 유산으로 받아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워즈워스가 서머싯에서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를 만난 해도 바로 1795년이었다. 두 시인은 빠르게 친분을 맺었다. 1797년 워즈워스와 그의 누이 도로시가 2년간 살았었던 도싯의 레이스타운 네더 스토웨이에 위치한 콜리지의 집과 불과 몇 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서머싯의 알폭스톤 하우스로 이사를 갔다. 워즈워스와 콜리지는 (도로시의 식견과) 함께 영국 낭만주의 운동의 중요한 작품인 <서정 담시집> (Lyrical Ballads, 1798년)를 창작했다. 이 시집에서 워즈워스나 콜리지는 그 둘 중 누구의 이름도 작가의 이름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워즈워스의 가장 유명한 시, <틴턴 수도원> (Tintern Abby)은 콜리지의 <노수부의 노래>(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와 함께 시집에 수록되었다. 재판은 1800년 간행되어 서문과 함께 워즈워스의 이름만을 작가로 실었다. 1802년 간행된 다음 판본에서는 많은 것들이 증보되었다. 이 판본의 서문에는, 몇 학자들이 낭만주의 문예 이론의 중심 작품이라 평하는, 워즈워스가 18세기 운문의 시적인 어조를 피하며 “사람들에 의해 실제로 쓰여지는” 일상 언어에 바탕을 둔, 그가 [직접] 본 것을 새로운 유형의 운문의 요소로서 논한 글이 실려있다. 이 판본에서 워즈워스는 “강렬한 느낌들이 자연스레 넘치는 것, 이것[시]는 자신의 유래를 평안속에서 회상된 감정에서부터 취한”다고 시에 대한 그의 유명한 정의를 말하며, 시집 속 그의 시들은 “실험적”이라 칭한다. 서정 담시집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판은 1805년 간행되었다.
더 보더러즈.
1795년과 1797년 사이에 워즈워스는 그의 유일한 희곡인 헨리 3세 시대를 다룬 운문 비극으로 북부 경계지방의 잉글랜드인이 스코틀랜드 유랑민들과 충돌하는 내용의 더 보더러즈(The Borderers)를 저술한다. 워즈워스는 1797년 11월에 극장 상영을 하고자 하였으나 “이 연극이 성공리에 상영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코벤트 가든 극장(Covent Garden Theatre) 운영인 토머스 해리스(Thomas Harris)에게 거절당한다. 워즈워스는 퇴짜맞은 걸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 희곡은 1842년 근본적으로 개작하기 전까지는 출간되지 않는다.
독일과 호수 지역으로의 이사.
워즈워스, 도로시, 콜리지는 1798년 가을에 독일로 여행을 떠난다. 콜리지는 여행에서 지적 자극을 받았으나 워즈워스는 여행을 하며 향수병을 느꼈다. 1798년부터 1799년의 매우 추웠던 겨울에 워즈워스는 도로시와 함께 고슬라르 (Goslar)에서 살았으며 극심한 스트레스와 외로움이 있었으나 훗날 <서곡>이라고 이름 붙인 자전적인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한다. 워즈워스는 고슬라르에서 <루시 시편>(The Lucy poems)를 포함한 다른 유명한 시들을 썼다.
1799년 가을, 워즈워스와 그의 누이는 영국으로 돌아와 소크번(Sockburn)에 있는 허치슨 가家를 만났다. 콜리지가 영국으로 돌아오자 콜리지는 그와 워즈워스의 출판인인 조세프 코틀(Joseph Cottle)과 함께 워즈워스와 만나러 북부로 갔으며 계획했던 호수 지역의 구경을 했다. 이 방문은 워즈워스 남매가 가까운 곳의 또 다른 시인, 로버트 사우디와 호수지역의 그라스미어(Grasmere)에 있는 도브 커티지 (Dove Cottage)에 정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워즈워스, 콜리지와 사우디는 ”호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시기에 쓰인 워즈워스의 많은 시들은 죽음, 인내, 이별과 고뇌라는 주제를 담고있다.
결혼과 자녀.
1802년, 로우더가의 후계자인 초대 론즈데일 백작 윌리엄 로우더는 워즈워스의 아버지에게 빚진 4,000 파운드를 지불했다. 이 돈은 워즈워스가 결혼하는데에 경제적인 능력을 주었다. 아네트와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누이 도로시와 함께 프랑스로 갔던 이후, 10월 4일 워즈워스는 그의 어릴적 친구 메리 허친슨과 결혼한다. 도로시는 오빠 부부와 계속 같이 살았으며, 메리와 친해졌다. 다음 해 메리는 다섯 자녀-그 중 세 명은 그녀와 윌리엄보다 먼저 사망-중 첫 자식을 보았다.
자전적 작품과 두 권의 시.
워즈워스는 그가 은둔자(The Recluse)라고 부르고자 한 삼부작의 긴 철학적인 시를 쓰기 위해 몇년간 계획하고 있었다. 1798년부터 1799년 워즈워스는 “콜리지에게 바치는 시” (poem to Coleridge)라고 언급했으며 은둔자라 칭한 거대한 작품의 부록이 되었을 자전적 시 창작을 시작했다. 1804년 그는 이 자전적 작품을 증보하여 부록으로 하기보다는 프롤로그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워즈워스는 1805년 지금은 흔히들 서곡이라고 부르는 작품의 첫 판을 완성했으나 은둔자들 전체를 완성하기 전까지 이 개인적인 작품을 간행하기를 거절했다. 그의 동생인 존의 죽음도 1805년에 있었는데, 그에게 심히 영향을 미쳤고 아마 이 작품들에 있어서 그의 결정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서곡과 <틴턴 수도원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쓰인 구절>같은 다른 시에서 보여지는 워즈워스의 [콜리지를 향한] 철학적인 의존은 학자들간 비평적 논의의 한 주제가 되고있다. 아마 워즈워스가 콜리지에게 철학적으로 영향을 심히 받았을 것이라고 오랫동안 여겨져왔으나, 최근들어 학자들은 워즈워스의 사상과 주제가 1790년 중반 콜리지와 친해지기 전에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며 주장한다.
특히, 1792년 혁명기 파리에 있을 당시, 22살의 워즈워스는 인도의 마드라즈에서 걸어서 페르시아와 아라비아를 거쳐 아프리카와 유럽으로, 신생국 미국으로 30년간을 방랑한 여행자 존 “워킹” 스튜어트 (1747 - 1822)와 교류를 했는데, 이 교류 시기 중 스튜어트는 워즈워스의 여러 철학적인 소견들이 크게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많은 분량의 독자적인 유물론 철학 저서인 자연의 종말 The Apocalypse of Nature (런던, 1791년)를 편찬했다.
1807년 워즈워스는 Ode :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가 수록된 <두 권의 시>Poems in Two Volumes을 출판했다. 이 시기 워즈워스는 서정 담시집으로만 알려져 있었으며, 새 시집이 그의 명성을 굳건히 해주기를 바랬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1810년 워즈워스와 콜리지는 콜리지의 아편 중독으로 관계가 서먹해져 있었고 1812년에는 워즈워스의 아들 토마스가 6살로 요절, 6개월 후 3살 캐서린도 사망했다. 뒤이은 해에 그는 워스트모얼랜드의 우표 배급인이 되었고, 1년 400파운드의 봉급은 그를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만들었다.
1813년 워즈워스 가족은 앰블사이드(Ambleside)의 라이델 마운트(Rydal Mount) (그라스미어와 라이델 워터 사이) 이사갔고,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계획서.
1814년 워즈워스는 유람The Excursion을 방랑자 삼부작의 2부로서 출판하였는데, 그는 1부나 3부를 한번도 완성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방랑자의 전체 작품의 의도와 구조를 세우고자 시 계획서Prospectus를 썼다. 계획서에는 인간 심리와 자연간의 관계에 관한 워즈워스의 가장 유명한 구절 몇 개가 실려있다.
현대의 몇몇 학자들은 1810년대 중반쯤 워즈워스의 작품이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데, 아마 그의 초기 시에서 특징되는 것들 대다수가 (상실, 죽음, 인내, 이별, 단념) 그의 글과 삶에서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1820년, 워즈워스는 동시대 비평가들이 그의 초기작을 재조명하는 동시에 큰 성공을 만끽하고 있었다.
1823년 그의 친구이자 화가였던 윌리엄 그린(William Green)의 죽음을 계기로 워즈워스는 콜리지와의 나빠진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1828년 둘은 라인란트에 같이 여행갔을 때 완전히 화해했다. 도로시는 1829년 그녀의 나머지 인생을 단념하게 할 정도의 심각한 병에 시달렸다. 콜리지와 찰스 램 둘 다 1834년에 사망했고, 그들의 부재는 워즈워스에게 심각한 정신적 타격이 되었다. 다음 해에는 제임스 호그(James Hogg)가 사망했다. 많은 동시대인의 죽음 가운데서도 워즈워스 시의 인기는 그가 상실한 이들을 대체한 젊은 친구들과 추종자들의 동향을 확고히 했다.
종교적 믿음.
워즈워스의 젊은 정치적 급진주의는 콜리지와는 다르게 한번도 그가 받은 종교적인 가르침에 반하여 반항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1812년 그가 국교회 설립을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있다며 말했었고 1822년 Ecclesiastical Sketches에서도 말한다.
워즈워스의 이같은 종교적 보수주의는 19세기에 극히 유명세를 탄 장시 The Excursion (1814)에서 역시 빛을 바란다. 이 시에는 세 주인공들, 방랑자, 프랑스 혁명에서 희망과 비참을 경험했던 은둔자, 나머지 1/3의 주인공 목사가 등장한다.
계관시인직과 다른 영광들.
워즈워스는 그의 말년에 각별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 1837년 스코틀랜드 출신 시인이자 극작가 조애나 베일리(Joanna Baillie)는 워즈워스와의 긴 교제를 회고했다. “그는 말하기에 알맞은 것이 있지 않는 한 절대 대화해서는 안되는 이처럼 생겼다. 하지만 그도 가끔은 쾌활하고 좋게 대화를 나누는 편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가 얼마나 친절하고 좋은지 알게 된다면, 그를 매우 만족시킬 것이다.”라고.
1838년 워즈워스는 더럼 대학교로부터 민법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뒤이은 1839년 존 케블John Leble이 그를 “인문의 시인”이라 칭송하던 때에-워즈워스는 이 찬사에 감동받았다-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같은 명예학위를 받았다.(워즈워스가 케블의 엄청 유명하던 기도시집인 <예수의 해>(1827년)에 영향을 많이 주었는가는 아직도 논쟁 대상이다.) 1848년 정부는 그에게 Civil List pension으로 매년 300파운드를 주었다.
1843년 로버트 사우디의 죽음 이후 워즈워스는 계관 시인이 되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나이가 너무 많다며 영광을 거절했으나 총리 로버트 필이 “당신은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을 것”이라 보증하자 받아드렸다. 워즈워스는 고로 어떠한 공식 시를 쓰지 않은 유일한 계관 시인이 되었다.
1847년 42세의 그의 딸 도라의 갑작스런 죽음은 늙은 시인에게 우울을 받아들이기 힘들게끔 했고, 그는 새로운 내용을 쓰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다.
죽음.
윌리엄 워즈워스는 1850년 4월 23일 흉막염의 악화로 자신의 저택 라이델 마운트(Rydel Mount)에서 사망했으며 그라스미어의 성 오즈왈드 교회(St Oswald’s Church)에 묻혔다. 미망인이 된 메리는 남편의 사망 몇 달 후 그의 길고 자전적인 “ 콜리지에게의 시”를 <서곡>으로 출간했다. 그 시대에 많은 관심을 받는데에는 실패했으나, 훗날 워즈워스의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게된다.
외부 링크.
기본 정보 및 작가 생애 관련
서적
워즈워스의 작품 |
318230 | 41239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30 | 워즈워스 | 워즈워스는 다음 사람 등을 가리킨다. |
31823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33 |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 알렉산드르 일리치 예고로프(, 1883년 10월 13일 ~ 1939년 2월 22일)는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이다. 스탈린의 대숙청때 희생된 최고급군인 중 한 명이다.
예고로프는 사마라 근방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1년 러시아 제국 군대에 입대하였고, 능력을 인정받아 1905년 장교로 임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소령까지 진급했고 5번이나 부상당할 정도로 용감히 싸웠다. 그는 사병시절인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하였으나, 10월 혁명에는 볼셰비키를 지지하여 붉은 군대에 가담하였다. 정규군 출신 장교가 드물었던 붉은 군대에서 그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어 단숨에 사령관 급의 직위를 맡았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그는 붉은군대의 남부전선 사령관을 맡아 우크라이나의 반혁명군을 진압하였다. 1920년에는 소련-폴란드 전쟁에 참전하였고, 이때 같이 참전하였던 스탈린과 세묜 부됸니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1925-1926년 예고로프는 장제스의 군사고문으로 중국에 파견되었고, 1927년에는 벨라루스 군관구의 사령관이 되었다.
1931년에는 부(副)국방인민위원(국방차관)에 임명되었다. 당직으로도 승진하여 1934년에는 소련공산당의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임명되었다. 1935년 붉은군대에 계급이 부활되자 최고 계급인 소련 원수에 임명되었다.
1937년 대숙청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스탈린과의 친분관계때문에 안전한 듯해 보였다. 1937년 6월에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군사재판에 판사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말 그는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1938년 체포되었으며, 그가 쓴 군사 저작들은 금서가 되었다.
그는 1939년 2월에 옥사했거나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사료에 의하면 그의 죽음은 1941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 원수와 마찬가지로 흐루쇼프 이후 그도 복권되었다. |
318236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36 | 네페르카민 아누 | 네페르카민 아누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파라오이다.
그의 존재는 아비도스 왕 목록과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만 찾을 수 있다. 토리노 파피루스에는 파라오들의 재위기간이 명시되어 있지만, 네페르카민 아누의 재위기간은 나와있지 않다. |
318237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37 | 카카레 이비 | 카카레 이비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파라오이다. 이는 '레의 영혼은 강하다'라는 뜻이다.
그의 이름은 아비도스 왕 목록과 토리노 파피루스에 나온다. 토리노 파피루스에 따르면 그는 2년 1달 1일을 다스렸다.
하지만 이 시기의 다른 파라오들과 달리 그는 사카라 남부에 작은 피라미드를 남겼다. 이것은 사카라에 있는 피라미드 중 가장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솁세스카프의 무덤 북동쪽에 위치한다. |
318238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38 | 네페르카우레 2세 | 네페르카우레 2세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파라오이다.
그의 이름은 아비도스 왕 목록과 토리노 파피루스에 나온다. 토리노 파피루스에 따르면 그는 4년 2달을 다스렸다. |
318239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39 | 네페르카우호르 | 네페르카우호르(Neferkauhor)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파라오이다.
그의 이름은 아비도스 왕 목록에 나온다. 토리노 파피루스에는 그의 이름이 나올 자리가 유실되어 있으며, 2년 1달 1일이라는 통치기간만 나온다. |
31824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40 | 와지카레 | 와지카레(Wadjkare)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파라오이다.
그의 이름은 아비도스 왕 목록, 토리노 파피루스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호루스 이름인 데메지브타위와 그가 반포한 칙령이 남아 있다.
와지카레가 다른 왕 목록에 나온 왕들 중 한 명과 동일 인물인지, 그들과는 별개의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
31824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41 | 이집트 제9왕조 | 이집트 제9왕조는 이집트 제1중간기의 한 시기이다. 왕조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대략 기원전 2160년부터 기원전 2130년까지 30간을 지속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집트 제6왕조가 무너진 후, 전국에 있는 지방 세력들이 각자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한다. 제9왕조의 창설자들은 헤라클레오폴리스에 지방 소국으로 자리를 잡았다.
알려진 역대 파라오.
앞선 제7, 제8왕조와 마찬가지로, 제9왕조의 파라오들도 확실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또한 아비도스 왕 목록과 사카라 석판에 이 시기를 고대 이집트의 안좋은 역사로 간주하여 이들의 존재를 고의적으로 지운 흔적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를 확인하기란 매우 어렵다. 마네토 역시 케티 1세만 언급하고 나머지 파라오들은 언급하지도 않았다. |
318250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50 | 출랄롱코른 | |
31825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51 | 대삼능 | 대삼능(大三能)은 종반 낱장기 유형 중 하나로, 쌍방 양사가 있을 때, 어느 한쪽에서 차(車)를 제외한 대기물(大棋物) 3개가 남은 형태를 말한다. 자기는 양사이면서 만약 상대가 양사가 아니라 외사인 경우, 어떤 대삼능으로든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양사를 이길 수 있는 대삼능.
서로 양사가 있을 때, 한쪽이 포(包)가 한 개 이상 포함된 대삼능이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그러나 포양상(包兩象)은 예외이다.
양사를 이길 수 없는 대삼능.
포가 포함이 되지 않은 대삼능은 상대방이 양사가 있고 방어 모양이 나쁘지 않다면 이길 수 없다. 또한, 포양상(包兩象)은 포가 포함이 되어 있는 대삼능 중에서 유일하게 빅이 된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차이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포(包)가 포함되지 않은 대삼능인 양마상()과 마양상()을 대범상이라고 부르는데, 대범상도 상대가 양사()가 있어도 반드시 이긴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포가 끼지 않은 대삼능은 양사를 이길 수 없다는 입장으로, 비기는 것으로 처리된다. |
318252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52 | 소삼능 | 소삼능(小三能)은 종반 낱장기 유형 중 하나로, 쌍방 양사가 있을 때, 어느 한쪽에서 차(車)를 제외하고 소기물(小棋物)인 졸·병(卒·兵)을 한 개 이상 포함한 공격 기물 3개가 남은 형태를 말한다. 소삼능은 양사(兩士)를 거의 이길 수 없으나, 예외도 있다. 만약 상대가 양사가 아니라 외사인 경우, 어떤 소삼능으로든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양사를 이길 수 있는 소삼능.
서로 양사가 있을 때, 대부분의 소삼능은 이길 수 없으나, 유일하게 양포졸(兩包卒) 또는 양포병(兩包兵)은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
과거에는 양포졸 또는 양포병도 다른 소삼능과 마찬가지로 양사가 있으면 비긴다고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는 정상급 고수들이 많은 연구를 거친 결과 이기는 기물로 정립되었다.
양사를 이길 수 없는 소삼능.
위의 예를 제외하고 모든 소삼능은 상대가 정수로 방어하면 양사를 이길 수 없다. |
318253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53 | 차삼능 | 차삼능(車三能)은 종반 낱장기 유형 중 하나로, 어느 한쪽에서 차(車)를 한개 이상 포함한 공격기물 3개가 남은 형태를 말한다. 차삼능은 거의 대부분 양사(兩士)를 반드시 이길 수 있으나 예외도 있다. 그러나 차와 다른 대기물이 존재하는 차삼능의 경우 양사를 100% 이긴다.
양사를 이길 수 있는 차삼능.
거의 모든 차삼능은 양사를 이길 수 있다.
차이능(車二能) 중에 양차(兩車)도 반드시 양사를 이길 수 있으므로, 양차를 포함한 차삼능은 표기하지 않기로 한다.
양사를 이길 수 없는 차삼능.
차삼능 중에 유일하게 차이졸(車二卒) 또는 차이병(車二兵)은 상대편이 양사가 있고 정수로 방어하면 이길 수 없다. 단, 이졸 또는 이병이 모두 궁성에 붙으면 100% 이길 수 있다.
과거에는 차이졸 또는 차이병도 다른 차삼능과 마찬가지로 양사를 이길 수 있다고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에는 정상급 고수들이 많은 연구를 거친 결과 비기는 기물로 정립되었다. |
31825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54 | 차이능 | 차이능(車二能)은 종반 낱장기 유형 중 하나로, 어느 한쪽에서 차(車) 한 개와 공격 기물 한 개가 남은 형태를 말한다. 차이능은 거의 대부분 양사(兩士)를 이길 수 없으나 예외도 있다. 또한 차이능은 거의 대부분 외사를 이길 수 있으나 예외도 있다.
양사를 이길 수 있는 차이능.
거의 모든 차이능은 양사를 이길 수 없으나, 양차(兩車)는 예외이다.
외사를 이길 수 있는 차이능.
거의 모든 차이능은 외사를 이기는 것이 가능하다. 앞에서 언급한 양차(兩車)는 물론이고, 차와 다른 대기물이 있는 차이능이라면 외사를 이길 수 있다.
외사를 이길 수 없는 차이능.
거의 모든 차이능은 외사를 이기는 것이 가능하나, 차졸(車卒) 또는 차병(車兵)은 이길 수 없다. 단 졸 또는 병이 궁성에 붙은 경우(사 대신 차여도 마찬가지)에는 100% 이길 수 있다. |
318255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55 | 낱장기 | 낱장기는 장기 대국의 종반전에 기물이 몇 개 남지 않았을 경우, 승패를 결정짓기 위한 기물의 정형화된 형태를 뜻한다. 조각장기라는 말도 간혹 쓰인다. 남은 기물이 대기물(大棋物)인지 소기물(小棋物)인지, 그리고 차(車)의 유·무(有·無)의 따라 각기 낱장기 유형으로 구분된다. 대표적인 낱장기 유형은 다음과 같다. |
318256 | 1476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56 | 알렉스 라미레즈 | |
31826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64 | 캔따개 | 캔따개는 통조림이나 음료수 캔을 개봉할 때 사용하는 도구이다. |
318266 | 2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66 | 주금류 | |
318268 | 3257892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68 | 저 푸른 초원위에 | 《저 푸른 초원위에》는 2003년 1월 4일부터 2003년 6월 29일까지 방영된 KBS 2TV 주말 드라마이다.
기획의도.
속이 꽉 찬 온달과 말괄량이 공주의 아름다운 순애보를 그린, 유쾌하고 따뜻한 사랑의 감동을 주는 드라마.
OST.
2003년 5월에 발매한 저 푸른 초원위에 OST는 노진영, Z.E.N, 제일, 김경훈등이 참여하였다. |
318272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72 | 발진 | 발진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
318273 | 22169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73 | 분자 오비탈 이론 | |
318274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74 | 장조 (전량) | 전량 폐공 장조(前涼 廢公 張祚, ? ~ 355년, 재위 : 353년 ~ 355년)는 중국 오호십육국 시대 전량(前凉)의 초대 국왕이다.
생애.
장조는 장준(張駿)의 서자(序子)로 장중화(張重华)의 형이었다. 장중화가 353년에 병에 걸리자 장요령(張耀靈)을 후계자로 삼고 장조를 섭정인으로 삼았다. 장중화는 죽기 직전 유언으로 사애(謝艾)에게 후사를 부탁하였으나 장조는 유언을 조작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장조는 곧이어 장요령을 폐위하여 양녕후(凉寧候)로 삼고 스스로 양공(凉公)에 즉위하였다.
354년에 왕을 자칭하고 사연호(私年號)를 제정하였으며 선대 군주들을 모두 왕으로 추존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간언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처형한 장조는 음란과 폭정을 자행하였고 주색을 탐하여 민심을 잃었다.
그의 후궁이 3만에 육박했고, 그 중 궁중요리사 서흑(徐黑)의 딸 서씨도 후궁에 속해있는데 장조는 그녀를 강간하였고 결국 그녀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후에 장조는 서흑에게 살해당했다.
환온(桓溫)이 북벌을 일으켜 전진(前秦)을 공격하자 전량의 진주자사(秦州刺史) 왕탁(王擢)이 환온의 북벌을 장조에게 알렸다. 이에 장조는 왕탁이 배반할 것을 두려워하여 암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으며 환온이 돌아가자 군사를 파견하여 왕탁을 공격하였고 패배한 왕탁은 전진으로 도망쳐 항복하였다.
355년, 장조는 하주자사(河州刺史) 장관(張瓘)을 몰아내려 하였으며 이에 장관은 반란을 일으켜 장요령을 복위시키려 하였다.
장조는 장요령을 살해하였으나 장관의 군대가 수도 고장(姑臧)에 육박하자 성 안에서 모반이 일어나 성은 함락되었으며 장조는 궁중요리사 서흑에게 살해당하였다. |
318276 | 67135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76 | 이경자 (1939년) | 이경자(李敬子, 1939년 9월 20일 ~ 현재)는 대한민국의 서울 출신 편집 제작자이다.
제작 노트.
편집기사 <이경자>가 영화가 시작한 것은 <잃어버린 청춘>을 제작하였으며, 데뷔작으로 <제이의 애정>으로 편집을 활동하였다. |
318278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78 | 네페르카레 | 네페르카레는 파라오의 이름으로, '레의 영혼은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 역사상 7명의 네페르카레가 있었다. |
318279 | 3119913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79 | 무(모)한 도전 | |
318281 | 1047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81 | 베드 타운 | |
318282 | 1126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82 | 제한적 본인확인제 | |
318283 | 8259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83 | 오마르 샤리프 | 오마 샤리프(, ; 1932년 4월 10일 ~ 2015년 7월 10일)는 이집트의 배우이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닥터 지바고》로 1960년대의 우상으로 군림했던 스타 배우였으며, 알츠하이머병을 앓다가 결국 심장 마비로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생애.
1932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레바논계 시리아 기독교신자인 Claire (née Saada)와 Joseph Chalhoub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샤리프의 본명은 Michel Demitri Chalhoub이다. 유아기를 이집트 카이로에서 잠시 보낸 적이 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빅토리아 단과대학을 나왔으며, 이후 카이로 종합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다. 이후 그는 목재 사업분야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을 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 《닥터 지바고》, 《화니 걸》,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의 작품으로 아카데미상에도 후보로 올랐으며 골든 글로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랍어, 프랑스어, 영어를 구사한 외국어 능통자이며, 할리우드의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경력.
1953년에 샤리프는 이집트 영화에 처음 출연했다. 이후 이집트 영화인으로서 처음으로 영어권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1962년에 출연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그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샤리프 알리의 역을 연기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게 된다. 이후 그는 《닥터 지바고》, 《퍼니 걸》등 여러 영화의 주연을 맡는다. 하지만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화니 걸》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의 공연은 이집트 정부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바브라는 유태계 미국인으로서 당시 이집트의 적국인 이스라엘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간헐적인 영화 출연을 하였으며, 2003년에 유대인 소년을 부양하는 터키인 상인의 모습을 그린 소설 원작 프랑스 영화에 출연하였다. 2005년에 유네스코로부터 다문화에 대해 기여한 공로로 수상을 했다. 오마르 샤리프는 77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연기력을 보여줬다. 《성인 베드로》에서 깊이있는 연기를 보여준 바 있다. 2015년 7월 10일 심장마비로 인해 향년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오마샤리프의 이름을 사용한 브랜드.
오마샤리프의 이름을 사용한 브랜드로는 팬티, 런닝셔츠, 양말, 화장품, 담배 등이 있다.
담배 브랜드.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는 오마르 샤리프 브랜드의 대한민국 내 사용권을 가진 경인상사 주식회사와 계약하여 1992년부터 오마르 샤리프 담배를 생산하였다. 하지만 2000년 경인상사와의 브랜드 사용연장 계약이 결렬되어 더이상 오마르 샤리프 담배는 생산되지 않고 있다. |
318287 | 1249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87 | 스윗소로우의 텐텐클럽 | |
318292 | 566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92 | 알함브라 | |
318293 | 94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93 | 구글 맵스 | |
318295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95 | 플루타르크 | |
318296 | 368112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96 | 아우렐리우스 | 아우렐리우스()는 다음을 의미한다. |
318297 | 4726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97 | 라블레 | |
318298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98 | 길버트 | 길버트(Gilbert)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
318299 | 104768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299 | QOOK TV | |
318300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300 | 하비 | 하비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
318301 | 414775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301 | 밀턴 | 밀턴()은 다음을 가리킨다. |
318302 | 20227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302 | 연예인지옥 & 신연예인지옥 | |
318303 | 94480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303 | 스위프트 | 스위프트(swift)는 다음 뜻으로 쓰인다. |
318305 | 33072616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305 | 로렌스 스턴 | 로런스 스턴(로렌스 스턴, Laurence Sterne, 1713년 ~ 1768년)은 영국의 소설가이다. 아일랜드에서 출생하여 요크에서 성직에 있었으며, 50세 가까운 나이가 되어 기서(奇書) 《트리스트럼 샌디》를 출판할 무렵까지는 지방적으로 문명(文名)을 인정받고는 있었지만 한 사람의 목사에 불과하였다. 그가 이 소설을 쓸 계기가 된 것은 요크 교회 내의 분쟁에 있어서 반대파를 야유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우의(寓意) 이야기로서 1760년에 《샌디》 제1·2권을 출판하여 일약 문단과 사교계의 일인자가 되었다. 따라서 《샌디》는 발생부터 풍자적인 색채가 짙은 것이었으나 줄거리의 진전에 따라 오히려 인간의 기미(機微)를 즐기는 방향으로 옮겨 가서 이 경향은 그가 죽은 해인 1768년에 나온 프랑스·이탈리아 여행기 《풍류기행(風流紀行)》에 가장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소설가로서의 스턴은 그의 성적(性的)인 관심과 구성이 무질서했기 때문에 19세기를 통하여 엄한 비판을 받았으나 금세기에 와서는 이야기 형식의 파괴로서 소설의 가능성과 영역을 크게 확대한 것이라 하여 수법의 면에서도 중요시되어 높이 평가되고 있다. |
318306 | 3120161 |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8306 | 플립플럽 |
Subsets and Spli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