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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조
이상조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317908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08
기본메모리
317909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09
민주 조선
317910
2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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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인터페이스 권한 분리
317911
1945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11
안진복
317912
1945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12
골복짱
317913
1945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13
깨복짱
317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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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14
MSConfig
MSConfig는 윈도우 시동 절차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사용하는 유틸리티 소프트웨어이다. 이전에 마이크로소프트 시스템 구성 유틸리티라는 제목으로 사용해오다가 윈도우 비스타부터 단순히 시스템 구성으로 부르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윈도우 2000을 제외한 윈도우 98 이후의 윈도우 운영 체제에 기본 포함되어 있다. 윈도우 95, 윈도우 2000 사용자들도 이 유틸리티를 다운로드받을 수 있지만 해당 운영 체제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MSConfig는 어느 프로그램이 시작 프로그램에서 실행되는지 수정하고 특정한 설정 파일을 편집하며 윈도우 서비스를 통해 제어를 단순화한다. 기본 윈도우 설치의 일부로서 MSConfig는 시작 메뉴나 제어판에 공통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사용자가 관리자 권한을 가지고 있으면 실행 대화 상자에서 'msconfig'라고 입력하여 이를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윈도우 비스타 이전에, 윈도우 9x 계열 운영 체제에서는 AUTOEXEC.BAT, CONFIG.SYS, WIN.INI, SYSTEM.INI를, 윈도우 비스타 이전의 윈도우 NT 계열 운영 체제에서는 WIN.INI, SYSTEM.INI, BOOT.INI을 편집할 수 있는 기능을 포함하였다. 이러한 파일들을 MSConfig를 사용하여 편집할 때의 이점은 단순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사용하여 이러한 파일들과 윈도우 시동 시퀀스와 관련된 윈도우 레지스트리 트리의 섹션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다는 점이다.
317915
2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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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성명제
317916
2543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16
복합명제
317917
22169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17
마이크로소프트 시스템 구성 유틸리티
317918
368112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18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
마쓰다이라 다다아키라()은 일본의 사람의 이름이다.
317919
2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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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레벨
317920
676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20
유토피아 (신좌파)
317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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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젖
317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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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계층
317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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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환성계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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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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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OS
썬OS(SunOS)는 유닉스 계열 운영 체제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사가 워크스테이션, 서버 컴퓨터 시스템을 위해 개발하였다. 썬OS라는 이름은 썬OS의 1.0 ~ 4.1.4 버전만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이 버전들은 BSD 유닉스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썬OS 버전 5.0 이후부터는 유닉스 시스템 V 릴리즈 4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브랜드 이름 솔라리스 하에 출시되고 있다. 썬OS 4의 최신판은 1994년 11월에 출시된 SunOS 4.1.4이며, 버전 5대의 최신판은 1992년 6월에 출시된 SunOS 5.x이다.
317931
35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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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 오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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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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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림 3세
셀림 3세(, , 1761년 12월 24일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플~1808년 7월 29일 오스만 제국 콘스탄티노플)는 오스만 제국의 29대 술탄으로 오스만 제국의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고 가장 큰 문젯거리였던 예니체리 군단을 폐지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즉위 이전. 셀림 3세는 술탄 무스타파 3세와 조지아 태생의 첩, 미흐리샤 발리데 술탄 사이에서 태어났다. 1725년 이래로 오스만 왕조에는 황자가 태어났지 않았기 때문에 셀림의 탄생은 상서로운 사건으로 생각되었다. 그의 삼촌 술탄 압뒬하미트 1세는 16세기 이래 톱카프 궁정의 예식을 깨뜨리고 셀림에게 사회적 활동의 자유를 줬다. 이 자유를 이용하여 젊은 왕자는 개혁파를 형성하고,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정치를 논했다. 그의 자유는 대재상 할릴 하미드 파샤가 1785년, 압뒬하미드 1세에 대항한 음모를 꾸밀때 그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끝이 났다. 서구화 정책. 시인이자 오스만 제국의 고전 음악에 능숙한 작곡가였던 셀림 3세는 아버지 무스타파 3세의 영향으로 개혁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었다. 1789년 4월 7일 삼촌 압뒬하미트 1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후 오스만 제국의 사회, 경제, 행정의 혼란을 청산하고자 노력했다. 재위 중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지적과 정치적 동요를 겪었으며, 1792년 개혁위원회를 만들어 새로운 법규들을 제정했다. 여기에는 지방행정·조세·토지소유에 관한 개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군사개혁이었다. 그는 새로운 육군학교와 해군학교를 세운 것 외에도 유럽식으로 무장하고 어려서부터 훈련시키는 보병대를 창설해 몰수·국유화한 봉토에서 나오는 수입과 술·담배·커피에 부과하는 세금으로 재정을 충당했다. 그리고 서구국가들과 직접 접촉하기 위해 주요 유럽 국가들의 수도에 오스만 제국의 대사관을 설치했다. 전쟁의 패배. 셀림 3세는 1787년~1792년까지 일어났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전쟁 와중에 왕위에 올라 오스트리아 제국과 1791년 시스토바 조약(스비슈토프)을, 1792년 러시아와 다시 지시 조약을 체결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자 셀림 3세는 영국,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고 1798년 7월 21일 오스만 제국군과 맘루크 군단이 이집트에서 벌어진 피라미드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크게 패했다. 1801년 프랑스가 이집트에서 철수하자 1804년 셀림은 나폴레옹을 황제로 인정하고 1806년 러시아와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예니체리 군단의 반란과 처형. 셀림은 오스만 제국의 가장 큰 문제인 예니체리 군단을 폐지하고자 노력했으나 셀림이 추구한 새로운 제도 개편과 프랑스 영향력 증대는 결국 예니체리 군단과 울라마(신학자들), 그리고 개혁으로 피해를 입은 반대세력들의 보수연합을 형성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805년 발칸반도 지역의 군대 재조직을 명령하자 예니체리들이 에디르네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1807년에는 야마크(징집보충병)들의 반란으로 결국 개혁을 폐지하고 투옥당했으며, 뒤이어 무스타파 4세가 왕위에 올랐다. 1808년 가을, 루스추크(지금의 불가리아 루세)의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가 이스탄불의 개혁파와 작당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성공하였으나, 예니체리를 비롯한 구법당은 알렘다르 무스타파가 이스탄불로 진군하여 도시를 장악하기 전에 셀림 3세를 암살해버렸다. 알렘다르 무스타파 파샤는 무스타파 4세를 폐위하고 마흐무트 2세를 군주로 옹립했다.
317937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37
지영준 (육상 선수)
지영준(池永駿, 1981년 10월 15일 ~ )은 대한민국의 육상 선수이다. 현재 코오롱 육상단 소속의 플레잉 코치를 맡고 있다.
317938
41477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38
대동강역
대동강역(大同江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력포구역에 위치한 평부선과 평덕선의 철도역이다. 본 역과 평부선의 시발역인 평양역 사이에 대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대동강철교로 연결되어 있다. 인근에 대동강호텔이 위치한다.
317943
214095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43
김전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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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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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타리오 직업은행
온타리오 직업 은행(Ontario Job Bank)은 모든 캐나다인이 사용할 수 있는 웹 기반의 구인 광고 네트워크다. 온타리오주 전 지역뿐만 아니라 캐나다 전국의 구직자들이 이곳에 에 게재된 구인 광고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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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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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제360호선
지방도 제360호선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성동 나들목과 양주시를 거쳐 포천시 가산면 가산2 교차로를 잇는 경기도의 지방도이다. 성동사거리에서 성동 나들목을 통해 자유로로 진입할 수 있다.
317968
56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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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 콜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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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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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P2X 위즈
GP2X 위즈(GP2X Wiz)는 GP2X의 후속작으로 게임파크 홀딩스(GPH)에서 제작한 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 겸 휴대용 게임기이다. 2009년 4월 30일에 발매되었다. 명텐도 논란. 2009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닌텐도 발언을 한 직후 언론에 의해 대중에게 ‘한국형 닌텐도’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대통령의 발언을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공의 게임기 이름을 따서 ‘명텐도’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위즈만의 특성 때문에 명텐도 논란은 사그라지고 있는 중이다. 예약판매. 게임파크 홀딩스는 2009년 4월 13일부터 30일까지 18일에 걸쳐서 자사의 홈페이지와 대형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예약판매와 보상할인 판매를 실시하였다. 예약판매 가격은 정식 출시 가격과 동일한 198,000원이었으나, 예약판매 구매자에게는 추가적으로 액정 보호 필름, 케이스, 스트랩 세트, 메탈 스티커로 구성된 5만 원 상당의 상품이 사은품으로 제공되었다. 보상할인. 게임파크 홀딩스는 예약판매와 동시에, 이전 기종인 GP2X F-100 및 GP2X F-200 사용자에 대한 보상할인 판매를 실시하였다. 보상할인은 선착순 100명에게 해당 기기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제품 가격의 20%를 할인해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보상할인 구매자에게도 예약판매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액정 보호 필름, 케이스, 스트랩 세트, 메탈 스티커로 구성된 5만 원 상당의 상품이 사은품으로 제공되었다. 배송 지연. 예약판매 구매자에게는 당초 2009년 5월 1일에 제품이 배송될 예정이었으나, 주문 폭주와 부품업체의 납기일정 차질로 인해 5월 6일부터 5월 9일까지로 배송 일정이 변경되었다. 게임파크 홀딩스 측은 4월 30일 자사 홈페이지의 공지를 통해 배송 지연에 대한 보상으로 예약판매 구매자와 보상할인 구매자에게 5천 원 상당의 문화상품권을 추가로 제공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구매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회사의 신뢰도에 금이 가게 되었다. 5월 6일에는 신문기사를 통해 늦어도 5월 8일까지는 배송을 시작한다고 밝혔으며, 자사 홈페이지의 공지사항에서는 5월 7일부터 주문 순서대로 배송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게임 목록. 내장 게임. 게임파크 홀딩스는 기기에 내장될 게임이 8종이라고 발표했으나,〈Space Varments〉는 게임물 등급 위원회의 전체 이용가 판정을 받지 못해 내장 게임에서 제외되었다. 전용 게임. 2010년 발매. 1월 4월 8월 10월 12월 2011년 발매. 1월 2월 3월 10월 발매일 미정. - 이 5개는 원래 라인업에 있었으나 현재 라인업에서 사라졌다. (PGM 2010은 후속기종 CAANOO로만 발매되었다 FunGP 개발자 센터. 2009년 3월 16일, GP2X Wiz의 앱스토어 역할을 할 FunGP의 개발자 센터가 오픈하였다. FunGP 개발자 센터에서는 개발을 위한 SDK, 개발 문서, 도움말, 예제 등을 지원하며 개발에 관련된 기술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후속 기종. CAANOO는 게임파크 홀딩스 GP2X Wiz의 후속 기기이다. 그동안 GP2X 사용자 커뮤니티에서 후속 기기와 관련한 소문이 돌다가 2010년 2월, 정식 공개 이전에 잠시 열렸던 FunGP 개발자센터의 개발 가이드 문서 내용에서 후속 기종인 N35라는 코드네임 형태로 밝혀졌으며 공식 명칭은 Caanoo로 결정되었다. 플레이아시아와 게임조선[1]에 따르면 2010년 8월 발매 예정이며 <혈십자 FW> 이외의 30여 종의 타이틀을 함께 선보일 예정이라 한다. 2010년 7월 21일 현재 GPH에서 오픈한 공식 티저 사이트에 따르면 7월 30일에서 8월 10일까지 예약 판매를 진행하였으며 8월 18일 론칭쇼와 함께 배송 시작 및 정식 발매되었으며 앱스토어와 커뮤니티 역할을 하는 FunGP도 오픈하였다.
317976
32555921
https://ko.wikipedia.org/wiki?curid=317976
아크로폴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는 그리스 아테네의 바위지대에 있는 성채이며, 건축학적,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고대 건축물들의 유적지가 있으며, 이 중에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유명하다. 아크로폴리스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단어 ἄκρον (아크론, "아주 높은, 최상의")과 πόλις (폴리스 "도시")에서 온 것이다. 아크로폴리스라는 단어가 포괄적이고 그리스에 다른 많은 아크로폴리스들이 존재하지만,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의 중요성으로 인해 흔히 아크로폴리스라고 하면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나타낸다. 고대 시대에는 최초의 아테네의 왕이라 여겨지는 전설속의 절반은 사람이고 절반은 뱀인 케크롭스 1세의 이름에서 붙여진 케크로피아 (Cecropia)라고 알려졌다. 아크로폴리스가 위치한 바위 언덕에 인간이 거주했다는 증거는 4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편, 기원전 5세기에 페리클레스는 파르테논 신전, 프로필라이아, 에레크테이온, 아테나 니케의 신전 등을 포함한 현재 남아있는 가장 중요한 유적지들의 건설 지시를 내렸다. 파르테논 외에 다른 건물들은 모레아 전쟁 기간 베네치아군의 1687년 포위 공격 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에 파르테논 신전에서 보관되던 화약이 포환을 맞고 폭발하였다. 유적 현황. 아크로폴리스의 입구는 프로필라이아라는 기념문이다. 입구의 남쪽으로는 아테네 니케 신전이라는 작은 신전 건물이 있다. 아크로폴리스 중앙에는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전, 즉 파르테논이 있다. 프로필라이아의 동쪽이자 파르테논의 북쪽에는 에레크테이온이라는 신전이 있다. 언덕 아래로는 디오니소스 극장 유적이 있고, 부분적으로 복원된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도 주변에 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나온 주요 유물은 언덕 남쪽 비탈의 아크로폴리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역사. 초기 정착지.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해발고도 150미터 위치에 있는 편평한 바위산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넓이는 약 3헥타르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신석기 중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원전 6000년경에 해당하는 신석기 초기부터 아티카 지방에 거주지가 있었다.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언덕 위에 미케네 시대의 메가론 궁전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메가론 유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석회암 기단 하나와 사암 계단 일부가 그 흔적일 수도 있다. 궁전이 건설된 후 높이 10미터, 두께 3.5~6미터의 키클롭스 성벽이 760미터 길이로 건설되었다. 이 성벽은 5세기까지 아크로폴리스의 주요 방어 수단이었다. 거대한 바위 블록이 2단으로 쌓여 있으며 블록 사이에는 엠플렉톤(ἔμπλεκτον)이라는 흙 모르타르를 채워 넣었다. 성벽과 문은 전형적인 미케네 방식에 따라 자연 지형의 윤곽을 따라 건설되었다. 성문은 남쪽에 비스듬한 방향으로 배치되어 공격자의 오른쪽 방향에 성벽 기단과 탑이 있게 되어 방어에 유리한 구조였다. 언덕 북쪽에도 좁고 가파른 진입로 두 곳이 있었다. 호메로스가 언급한 '에레크테우스의 견고한 집'(오디세이아 7.81)은 바로 이 성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3세기 이전에 어떤 시점에 지진이 발행해 아크로폴리스의 북동쪽 주변에 틈이 생겼다. 이 틈은 부드러운 이회토 바닥까지 약 13미터에 이르며 이곳에 우물이 파졌다. 이곳에 정교한 계단이 건설되었으며, 우물은 미케네 시대에 공성전이 벌어졌을 때 소중한 수원이었다. 고졸기의 아크로폴리스. 고졸기까지 아크로폴리스의 건축적 외형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7세기와 6세기에 킬론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곳을 점령했고, 페이시스트라토스도 두 번이나 이곳을 차지했다. 모두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시도였다. 후대에 언급된 헤카톰페돈과는 별개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프로필라이아라는 정문을 건설했다. 거기에다 언덕 북서쪽 기슭에 있는 가장 큰 샘인 클렙시드라를 포함하기 위해 아크로폴리스 주변에 9개의 성문이 있는 성벽, 즉 엔네아필론도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아테나이의 수호신인 아테나 폴리아스에 바쳐진 신전은 기원전 570년에서 550년 사이에 세워졌다. 도리스식 석회암 건축물로서 많은 유물이 남아 있으며, 그리스어로 '100피트'를 뜻하는 '헤카톰페돈'이라고 불렸다. 이 신전이 이전 건축물을 대체했는지 혹은 신성한 구역이나 제단을 차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헤카톰페돈은 현재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자리에 건설되었을 것이다. 기원전 529년에서 520년 사이에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에 의해 옛 아테나 신전이 건설되었다. 이 건물은 '옛 신전'이란 뜻의 '아르카이오스 네오스(ἀρχαῖος νεώς)'라고 불렸다. 이 아테나 폴리아스의 신전은 에레크테이온과 현재 파르테논 신전 사이의 되르펠트 층 위에 건설되었다. 옛 아테나 신전은 기원전 480년~479년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 페르시아군이 아테나이를 점령했을 때 파괴되었다. 기원전 454년에 신전은 다시 재건된 것으로 보이는데, 델로스 동맹의 보고가 이곳 후실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크세노폰은 옛 아테나 신전이 방화로 불에 탔다는 언급을 하고 있어 기원전 406/405년에 신전이 소실된 것 같다. 기원후 2세기에 파우사니아스 (지리학자)는 '그리스 묘사'에서 이 신전을 언급하지 않았다. 기원전 500년경 헤카톰페돈은 더 큰 건물인 '옛 파르테논(혹은 '이전 파르테논')'을 새로 지을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해체되었다. 이런 이유로 아테나이인들은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두 아들과 연관된 올림피에이온의 건설을 중단하기로 하고, 대신에 여기에 쓰기로 했던 피레이에우스의 석회암 재료를 이용해 옛 파르테논을 건설했다. 새 신전을 배치하기 위해 언덕 정상부의 남쪽을 비우고 약 8000개의 2톤짜리 석회암 블록을 깔아 기단을 마련하고 남아있는 성벽은 흙으로 채웠다. 그러나 기원전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계획이 변경되어 대리석을 사용했다. 건물의 석회암 기단은 '이전 파르테논 1층', 대리석 기단은 '이전 파르테논 2층'이라고 불린다. 기원전 485년에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왕위에 오르고 전쟁이 임박하자 자원을 아끼 위해 건설 작업이 중단되었다. 기원전 480년에 페르시아군이 도시를 점령해 약탈할 때도 옛 파르테논은 아직 건설 중이었다. 대부분의 신전은 약탈되고 훼손되었으며, 옛 파르테논과 옛 아테나 신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아테나이인들은 도시를 버렸다가 페르시아군이 떠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다. 아테나이인들은 미완성 신전의 여러 자재(홈을 내지 않은 기둥 조각, 트리글리프, 메토프 등)를 모아다가 아크로폴리스 북쪽 외벽을 새로 건설했다. 이 외벽은 지금도 볼 수 있다. 한편 신전이 파괴된 자리에 남은 잔해를 치우고, 언덕에 깊은 구덩이를 여러 곳 판 다음 조각상, 제의 용품, 봉헌물을 비롯해 재활용할 수 없는 건축 자재를 의례를 치르고 파묻었다. 덕분에 현재의 파르테논 신전을 세울 자리 주변에 높은 토대를 쉽게 마련할 수 있었으며, 19세기 말에 잔해물이 발굴되어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을 이루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파르테논 신전 건설. 키몬과 테미스토클레스는 기원전 468년에 에우리메돈에서 승리한 후 아크로폴리스 남단과 북단 성벽의 재건을 명령했다.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주요 신전은 아테나이의 황금 시대(기원전 460~430년)에 페리클레스의 명령으로 재건되었다. 아테나이의 조각가 페이디아스와 유명한 건축가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재건 사업을 담당했다. 기원전 437년에 므네시클레스가 아크로폴리스 서쪽 끝에 펜텔리코스산 대리석을 이용한 도리스 양식으로 프로필라이아 기념문을 재건했다. 프로필라이아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옛 프로필라이아 자리 일부 위에 지어졌다. 열주는 기원전 432년에 거의 완공되었으며, 양쪽에 부속 건물이 있는데 북쪽 건물은 폴리그노토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거의 같은 시점에 프로필라이아 남쪽에는 아테나 니케 신전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신전은 펜텔리코스산 대리석을 이용해 만든 작은 이오니아식 양식 건축물로 그리스 신전 건축의 전형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신전 건설에 차질을 빚었지만 기원전 421년에서 409년 사이 니키아스 화약 때 완공되었다. 기원전 421~406년에는 펜텔리코스산 대리석으로 만든 우아한 신전 건축물인 에레크테이온이 건설되었다. 에레크테이온은 매우 울퉁불퉁한 지표면의 형태와 아크로폴리스 경내에 배치된 여러 성소의 위치를 피해서 복잡한 구조로 배치되었다. 동쪽으로 면한 입구에는 여섯 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이 늘어서 있다. 특이하게도 에레크테이온에는 두 곳에 현관이 나 있는데 북서쪽 현관은 이오니아 열주가 있고, 남서쪽 현관에는 카리아티스라고 하는 거대한 여자 조각상 기둥이 늘어서 있다. 신전 동쪽 부분은 아테나 폴리아스에게 바쳐졌고 서쪽 부분은 헤파이스토스와 에레크테우스의 형제인 부토스의 제단이 있어 고졸기 시대 포세이돈 에레크테우스 왕의 의식을 집전하는 데 쓰였다. 에레크테이온 내부의 원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기원전 1세기에 화재로 파괴되고 이후 여러 차례 재건되었다. 같은 시기에 아테나 폴리아스, 포세이돈, 에레크테우스, 케크롭스, 헤르세, 판드로소스, 아글라우로스의 신전 등 신전 구역의 여러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아테나 니케 신전과 파르테논 신전 사이에는 아르테미스 브라우로니아의 성소(브라우로네이온)이 있었다. 아르테미스 브라우로니아는 보통 멧돼지와 함께 표현되며 브라우론 데모스 구역에서 숭배되던 여신이었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기원전 4세기에 만들어진 여신의 목조 신상(크소아논)과 프락시텔레스가 만든 아르테미스 조각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프로필라이아 뒤에는 페이디아스가 만든 아테나 프로마코스(최전선에서 싸우는 아테나)의 거대한 청동상이 있었다. 청동상은 기원전 450년에서 448년 사이에 제작되었으며, 기단 높이는 1.5미터, 청동상 전체 높이는 9미터에 이르렀다. 여신은 창을 들고 있었는데, 창끝에는 금박을 입혀 수니온곶을 돌아가는 배 선원들도 반사되는 빛을 볼 수 있었다. 왼쪽에 든 거대한 방패에는 켄타우로스와 라피테스족의 싸움이 묘사되어 있었다. 칼코테케, 판드로세이온, 판디온 성소, 아테나 제단, 제우스 폴리에우스 성소 및 로마 시대에 건설된 아우구스투스 원형 신전은 현재 흔적만 남아 있다.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 헬레니즘과 로마 시대에 아크로폴리스 경내에 있던 건물들이 오래되거나 전쟁 피해로 훼손된 탓에 수리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2세나 에우메네스 2세의 기념물이 추가되었다. 로마 제정 초기에 파르테논에서 23미터 앞쪽에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신전이라는 작은 원형 신전이 건설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북쪽 비탈에는 고전기 이래 판 신을 모시는 동굴 옆에 다른 동굴에서 아폴론 성소가 건설되었다. 서기 161년에 남쪽 비탈에는 로마인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오데온이라고 하는 거대한 반원형 극장을 건설했다. 아티쿠스 극장은 이후 헤룰리인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가 1950년대 들어서야 재건된다. 서기 3세기에 헤룰리인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아크로폴리스 성벽이 보수되었으며, 프로필라이아 입구에는 방어용으로 '뵐레' 문이 건설되어 아크로폴리스는 요새로 쓰이게 되었다. 비잔티움, 라틴, 오스만 제국 시대.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 파르테논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봉헌된 교회로 쓰였다. 라틴인(프랑크인)이 지배한 아테네 공국 시대에 아크로폴리스는 행정 중심지로 기능하여 파르테논은 성당이 되고 프로필라이아는 공작궁이 되었다. 프랑코피르고스라는 거대한 탑도 건설되었는데 19세기에 파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리스 지배 이후 파르테논은 튀르크군의 요새 사령부가 되었고 에레크테이온은 사령관의 개인 하렘으로 전락했다. 1687년 모레아 전쟁 당시 베네치아군이 아크로폴리스를 포위하면서 이곳 건물들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화약 창고로 쓰였던 파르테논 신전은 포격을 맞고 반파되었다. 이처럼 아크로폴리스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세력의 손을 거치면서 비잔티움, 프랑크, 오스만식 구조물이 들어섰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에는 파르테논 신전 내부에 첨탑이 딸린 모스크가 들어섰다. 그리스 독립 전쟁 당시에도 1821~1822년에 두 차례, 1826~1827년에 한 차례 공성전이 벌어졌다. 1822년과 1825년 사이에 그리스인들은 요새에 유일한 수원지인 클렙시드라 샘을 확보하고 오디세아스 안드루초스의 이름을 딴 새 요새를 건설했다. 독립 후 아크로폴리스는 고대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경내에 있던 비잔티움, 프랑크, 오스만 시대의 구조물이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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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스 (해커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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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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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대형메기
메콩대형메기("Pangasianodon gigas")는 동남아시아의 메콩강 유역에 서식하는 매콩메기과에 속하는 종이다. 확인된 바로는 최고 몸길이 2.7미터, 몸무게 293킬로그램이 나가는 개체가 목격된 바가 있다. 남획으로 수가 크게 줄어 국제자연보호연맹의 레드리스트에 올라와 있으며, CITES 부속서 I에도 올라와 있다. 메콩강 유역 국가인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는 모두 이들을 보호종으로 지정했지만, 포획은 지속되고 있다. 같이 보기. 징기스칸과 혼동하기 쉽다. 특히 영명이 혼동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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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콩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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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장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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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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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이즈마일로프
미셸 L. 이즈마일로프(, 1991년 3월 30일 -, 로스앤젤레스)는 미국의 공상과학작가이자 환타지작가이다. 그녀가 쓴 작품 《드림 워치》(The Dream Watch)는 베스트셀러로 알려져 있다. 11살에 처녀작인 《포켓 워치》(The Pocket Watch)를 발표했다. 그리고 3번째 작품 《갤럭시 워치》(Galaxy Watch)는 2009년 1월에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다. 이즈마일로프는 러시아계 미국인 4세이다. 2009년에 알파레타 고등학교(Alpharetta High School)를 졸업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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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네오코끼리
보르네오코끼리("Elephas maximus borneensis")는 동남아시아의 보르네오섬에 서식하는 아시아코끼리의 아종이다. 아시아코끼리의 아종 중 가장 작으며 피그미코끼리 라고도 불린다. , 숲 파괴로 인한 서식지 상실에 따라 수가 감소하고 있다. 열대우림 또는 열대 삼림지대에 서식한다.수명은 약 7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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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제1007호선
지방도 제1007호선(마암 ~ 상봉선)은 경상남도 고성군 마암면 화산삼거리와 진주시 상봉동 봉곡광장 교차로를 잇는 경상남도의 지방도이다. 진주시 북부를 우회하며, 진주시 진성면과 문산읍에 이르는 구간은 국도 제2호선, 집현면에서 미천면에 이르는 구간은 국도 제33호선과 중첩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진성면의 진성 나들목에서 남해고속도로와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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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수도사물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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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발족제비
검은발족제비()는 북아메리카 평원에 서식하는 족제비의 일종이다. 검은발페릿이라고 불리기도 하나, 가축화된 페릿과는 다르다. 전염병과 환경 개발로 인한 서식지 상실로 인해 오래 전부터 수가 줄어왔으며, 캐나다에서는 1937년에 멸종되고 1967년 미국에서 보호종으로 지정되었다. 1986년에는 불과 18마리만이 잔존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그 후 수는 급등해 1,000마리로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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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발페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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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제1006호선
지방도 제1006호선(명석 ~ 차황선)은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명석삼거리와 산청군 차황면 황산교삼거리를 잇는 경상남도의 지방도이다. 산청군 구간에선 국도 제20호선과 국도 제59호선을 서로 이어주며, 진주시 구간에서는 국도 제3호선이 미처 흡수하지 못하는 명석면 중심과 그 일대를 국도 제3호선과 연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진주시와 산청군을 이어주는 구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 구간 왕복 2차로로 이루어져 있으며, 진주시 명석면에서 산청군 신안면에 이르는 구간은 임도 구간이라 통행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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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 1851년 오스트리아 제국 브르노 ~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크람사흐)는 오스트리아의 정치가·경제학자이다. 하이델베르크·라이프치히·예나 대학에서 법학·경제학을 공부하였다. 그 후 빈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895년 이후 3차례에 걸쳐 재무상을 지냈다. 한계 효용 가치설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이자론에 대한 시차제(時差制)를 주장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또한 마르크스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주요 저서 《자본 및 자본의 이자》, 《경제적 재가치의 기초 이론》 등이 있다.
318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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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켄의 요괴
일반적으로 ‘브로켄의 환영’이라고 하는 브로켄(Brocken) 현상은 사물의 뒤에서 비치는 태양광이 구름이나 안개에 퍼져, 보는 사람의 그림자 주변에 무지개 같은 빛의 띠가 나타는 일종의 대기광학 현상이다. 독일의 브로켄 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브로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모습이 요괴와 같아서 브로켄의 요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브로켄 산에서 마녀들이 연회를 벌인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브로켄의 요괴현상을 보고 마녀들의 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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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식 기병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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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원
이후원(李厚源, 1598년 ~ 166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사심(士深), 호는 오재(迂齋)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의 7대손이며 군수 이욱(李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정욱의 딸 장수황씨이다.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과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하였고 장악원에 보관되어 있던 《악학궤범》을 인쇄하여 여러 사고에 나누어 간직하게 하였다. 이후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 우승지, 좌승지,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효종이 즉위하자 북벌계획에 참가하여 전함 200여 척을 준비하였고 그 후 대사헌, 공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쳐서 우의정이 되어 송준길, 송시열 등의 인재를 등용시켰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318007
41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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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점봉
심점봉(1893년 ~ ?)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구리시 아천동 출신으로 직업은 농업이다. 생애. 1919년 3월 식민지 지배에 항의하여 전국에서 3·1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3월 28일 오후 5시에 같은 마을에 사는 이강덕과 함께 아천동 주민 수십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아천동, 토평동, 교문동 일대에서 시위를 하였다. 다음날인 29일에도 아차산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로 인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1919년 5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기각판결을 받고 형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318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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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식 저격총
318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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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제1029호선
지방도 제1029호선(진전 ~ 정곡선)은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암 교차로와 의령군 정곡면 죽전리를 잇는 경상남도의 지방도이다. 함안군 법수면과 군북면을 잇는 주요도로 역할을 하며, 군북면을 남북으로 관통한다. 전 구간 왕복 2차로로 구성되어 있으며, 2010년 7월 현재 함안군 법수면과 창원시 진전면을 잇는 왕복 2차로의 도로의 공사가 완료되었다. 함안군 군북면에 위치한 장지 나들목에서는 남해고속도로와 교차한다.
31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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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흥
이수흥(李壽興, 1905년 5월 27일 ~ 1929년 2월 27일)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이천군 이천읍 창전리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황해도 황주를 거쳐 전라북도 전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아명(兒名)은 이좌성(李佐聖)이고 불교 승려 시절 법명(法名)은 성좌(聖佐)이다. 생애. 이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한때 불교 승려 생활을 했다가 환속을 한 선생은 1923년 만주로 망명해 대한통의부에 가입하고 지린 성(吉林省) 어무 현(額穆縣)의 신명무관중학교(新明武官中學校)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속부대로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가 결성되자 1924년에 가입해 제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로 활동했다. 1925년 일제 경찰의 기습 공격으로 참의부원 다수가 전사한 고마령(古馬嶺) 참변 이후 이수흥 선생은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1926년 5월 국내로 돌아와 의열 투쟁을 시작했다. 선생은 황해도 평산군, 경성부, 경기도 안성군, 여주군, 이천군 등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순사·친일 부호·친일 토호 처단과 면사무소·헌병분대·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일경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선생의 활동은 1926년 11월까지 계속됐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끝내 일경에 붙잡혀 1928년 7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선생은 일제 재판부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며 공소를 포기하고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18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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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N지연
이삭N지연(이삭 앤 지연)은 대한민국의 여성 2인조 음악 그룹이다. 여성 ‘Fly To The Sky’라고 소개되며 2002년 정규 앨범 《TELL ME BABY》로 데뷔하였으나,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2004년 해체하였다.
318014
65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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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읍
장호원읍(長湖院邑)은 대한민국 경기도 이천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읍이다. 읍 행정복지센터 소재지는 진암리이다. 역사. 이 지역은 음죽군이었으나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이천군에 합병되어 청미면이 되었다. 1941년 10월 1일에 장호원읍으로 승격하였고, 1996년 3월 1일에 이천군이 시로 승격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지리. 서울, 충주, 부산에 이르는 간선도로와 평택, 제천, 영월간의 동서 횡단도로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 발달하였다. 시가지는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에 있는 청미천의 서안에 발달되어 동안에 위치한 음성군 감곡면과 함께 쌍자도시를 이루고 있으며, 미곡의 생산량이 많다. 읍내에는 이천온천, 효양산, 설성산, 봉미봉, 수목이 울창한 백족산과 그 기슭의 자점보, 원적산, 율수폭 등이 있다. 특산물은 복숭아이다. 교통. 철도. 1927년부터 1944년까지 경기선 장호원역이 존속하였으나 현재는 철도계 궤도 교통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부내륙선 장호원역이 2021년 개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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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하라 가즈히로
기요하라 가즈히로(, 1967년 8월 18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인물. 프로 입문 전. 초등학교 ~ 중학교 시절. 기요하라의 친가는 도시바 전기 기구점을 운영하는데 그의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온가족이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이며, 그 영향으로 기요하라도 요미우리의 팬으로 자랐다. 1974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가 요미우리의 V10을 저지한데 이어 다음 해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센트럴 리그를 제패하자 가족들이 응원하는 요미우리가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야구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1974년, 기요하라는 기시와다 시립 야기미나미 초등학교에 입학, 야구를 시작했는데 그 중 기시와다 리틀 리그 부원 모집 포스터를 보고 입단 테스트를 받아 입단했고 매일 할아버지로부터 100엔씩을 받으며 비오는 날도 마다하지 않고 연습에 매진했다. 1977년, 6학년들 뿐인 주전 선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4학년으로 주전 선수가 되었고, 그 후 투수에도 재능을 발휘했으며 6학년 때는 팀내 에이스 겸 4번 타자를 맡아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 후, 기시와다 시립 구메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기시와다 시니어 리그로 소속을 옮겨, 중학교 2학년때부터는 팀내 주장으로 간사이 시니어 대회 우승에 성공했다. 3학년때는 구장의 그물을 흔드는 홈런을 기록했다. 고등학교 시절.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자신을 찾아온 약 30개 학교의 제안들 중 PL가쿠엔 고등학교의 제안을 택하여 진학했다. 처음에는 덴리 고등학교와 PL가쿠엔 고등학교를 사이에 두고 고민하고 있었으나, 견학 중 덴리 고등학교에서는 3학년은 연습을 하고 1학년은 공을 줍고 있는 장면을 보았고, PL가쿠엔 고등학교에선 학년과 상관 없이 다함께 같은 연습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결국 마음이 기울었다. 처음에는 투수직을 원했으나 동기 구와타 마스미의 비범한 실력을 보고 “(구와타에게는 투수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라 생각하며 야수를 택했다. 한편 구와타 또한 자신보다 훨씬 체격이 큰 동료들을 보며 자신이 고교 야구에서 통하지 않을꺼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당시 배팅 연습 때 비거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대나무 방망이를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구를 네트를 넘어 바깥쪽으로 보낸 덕분에 그의 철망은 무언가를 잔뜩 덧댄 누더기 같았다고 하는 일화가 있다. 이 철망은 지금도 ‘기요하라 네트’라 불리고 있다. 전국에서 정예만 모이는 PL가쿠엔 고등학교 야구부에 1학년 때부터 4번 자리를 차지하며 에이스 자리를 맡은 구와타와 함께 고시엔 대회에 5계절 연속 출장을 기록했으며 1학년 하계 대회 우승, 2학년의 춘계, 하계 대회 준우승, 3학년의 춘계 대회는 4강, 3학년 하계 대회 때 두 번째 우승을 기록했다. 특히 기요하라와 구와타는 KK콤비라 불리며 구와타 - 기요하라 세대로 불리는 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후 같은 세대인 마쓰야마 히데아키(오릭스), 이마쿠루스 나리유키(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세이부), 다쿠미 마사히로(긴테쓰) 또한 모두 프로 구단에 입단하여 활약했다. 고시엔 대회에서 개인 통산 13개의 홈런을 날리는 등 고등학교 시절 동안 총 64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3학년 하계 고시엔 대회에서 단일 대회 통산 신기록인 5호 홈런을 쏘아올리자 아나운서 우에구사 사다오가 “고시엔은 기요하라를 위해서 있는 것인가!”라고 중계하기도 했다. 3학년 시절 춘계 대회에서는 하마마쓰 상업 고등학교와의 경기와 같은 해 하계 대회에서의 도카이 대학 야마가타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는 감독에게 강하게 요구하여 투수로도 등판했다. 호쾌한 홈런을 비롯하여 시합 자체로도 많은 전설을 낳았지만 연습에 대한 진지한 태도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 사연 중 하나로 3학년 춘계 대회 준결승에서 고치 현립 고등학교의 와타나베 도미오에게 3개의 삼진을 당하며 틀어막혀 팀의 1-3 패배를 지켜볼 수 밖에없었는데 시합 후 벤치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만 (고등학교 3년 중에 유일하게 고시엔 대회 결승 진출에 실패한 대회다.) 그 날 학교로 돌아온 후 밤에 나카무라 쥰지 감독이 아무도 없어야할 실내 연습장 불이 켜져 있자 가봤는데 윗옷을 벗은 기요하라가 땀을 비같이 흘리면서 혼자 묵묵히 배팅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이부 시절. 어릴 적부터 열렬한 요미우리의 팬이었던 기요하라는 요미우리에 입단하기를 희망했지만 요미우리는 와세다 대학 진학을 계획하고 있던 구와타 마스미를 드래프트 1위 강행 지명하였다. 기요하라는 난카이, 닛폰햄, 주니치, 긴테쓰, 세이부, 한신 총 6 구단으로부터 1위 지명을 받았다. (KK 드래프트 사건) 만약 요미우리에 입단할 수 없다면 친가 쪽에 가까운 한신 입단도 고려하고 있었지만 추첨 결과 세이부가 교섭권을 획득했다. 드래프트 후 기자회견에서 실의에 빠져 눈물을 머금은 모습이 방송되기도 했다. 이 때 요미우리는 팀 사정으로 인해 구와타를 포함하여 1위에서 4위까지의 드래프트 권한을 모두 투수에게 사용하였으며 1루에는 나카하타 기요시, 3루에는 하라 다쓰노리가 주전 자리를 쥐고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기요하라가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결국 기요하라는 그대로 등번호 3번을 단 채 세이부로 입단했고 루키 시즌 개막 후 두 번째 경기에서 수비 강화를 위한 대수비로 투입되면서 데뷔 경기를 가졌다. 첫 타석에서 볼넷을 얻은 기요하라는 두 번째 타석에서 프로 첫 안타를 홈런으로 기록했다. 그 이후로 활약을 이어가며 고졸 신인 사상 처음으로 31홈런을 기록하며 역대 신인 홈런 기록 타이를 이루었으며 타율도 0.304를 올렸고 타점도 78개를 올리며 신인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워 그 해 신인왕에 등극했다. 일본 시리즈에도 8경기 모두 4번 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장하여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다. 이 해 일본 유행어 대상을 탄 신인류라는 말의 대표격으로 여겨져 구도 기미야스 등과 함께 표창식에 참석했다. 세이부의 황금 시대의 상징이자 4번 타자로 군림하며 3번 타자 아키야마 고지와「AK포」를 형성했다. 1988년에는 용병 타이 반 버클레오와 「AKB포」로 불리었으며 89년 이후에는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와 함께「AKD포」를 형성했다. 전성기에는 '삼관왕에 가장 가까운 남자'로 칭송받았으나 1995년 구도 기미야스 등 주력 선수들이 팀을 떠나 팀 전력이 크게 약화돼 연속 우승 기록도 끊기며 1996년에는 입단 후 첫 루징 시즌과 함께 황금기의 종지부를 찍었다. 기요하라 또한 95년 프로 데뷔 후 첫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처음으로 1군에서 말소되었다. 한때는 유일하게 오 사다하루를 넘을 수 있다고 여겨졌고 입단 4년차였던 1989년 6월 4일 21세 9개월이라는 사상 최연소 나이로 통산 100개 홈런을 돌파했다. 3년 후 1992년에는 다시 최연소 기록인 24세 10개월로 통산 200홈런을 달성했다. 은퇴 후 자신은 세이부 시절 늘 통산 홈런 개수 기록을 오 사다하루의 그것과 비교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1년에 몇 개의 시합 정도는 3루수로 출전했으며 일본 시리즈에서 센트럴 리그팀 홈구장에서 경기를 가질 때 평상시 지명타자를 맡던 데스트라데가 1루수를 보는 대신 기요하라가 3루로 포지션을 변경해 뛰었다. 1990년, 당시 프로 선수로써는 사상 최연소로 연봉 1억엔을 돌파하는 선수가 되었다. 1986년부터 1988년까지, 또 1990년부터 1994년까지 총 8번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6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1986년 - 1988년, 1990년 - 1992년) 공헌했다. 물론 단 한번도 일본 시리즈 MVP에 올라서진 못했지만 1986년, 1988년에는 우수 선수에, 패배한 1993년, 1994년에는 감투상을 수상했다. 덧붙여 세이부 입단 때는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의 헬멧이 없어서 곤란하던 중 우연히 1980년에 이 구단에서 은퇴한 노무라 가쓰야의 헬멧을 발견해 이것이 딱 맞아서 은퇴할 때까지 23년간 팀이 바뀔 때마다 색을 다시 칠해가면서 이 헬멧을 사용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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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N 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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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마두 디아라
마하마두 디아라(, 1981년 5월 18일, 바마코 ~ )는 말리의 전 축구 선수로, 현역 시절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그는 말리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경력. 초기. 디아라는 그리스의 OFI에서 성인 무대에 첫 발을 내디뎠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아른험의 피테서로 이적했다. 그는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리옹 선수였고, 마이클 에시엔과 성공적으로 중원을 맡았다. 그는 리옹에서 리그 1을 4차례 우승을 거두며 구단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알 마드리드. 파비오 카펠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 라몬 칼데론 회장에 3명의 선수 영입을 요청하며 "디아라, 디아라, 그리고 디아라"라고 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레알 마드리드는 마하마두 디아라 영입을 놓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경합했다. 리옹은 그에게 €40M의 가격을 책정해 디아라가 떠날 수 없음을 시사했다. 2006년 8월 18일, 레알 마드리드는 €26M에 그를 영입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입단식에 참석한 디아라는 칼데론 회장으로부터 등번호 6번을 받았다. 2006-07 시즌, 디아라는 파비오 카펠로의 지시에 따라 도펠젝서 2명 중 한 명의 임무를 맡으며 선수단의 주축을 담당했다. 그는 마드리드가 출전한 38경기 중, 33번을 출전했고, 3골을 기록했다. 2007년 6월 18일, 레알 마드리드는 2002-03 시즌 이래 첫 리그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마요르카를 격파할 필요가 있었는데, 디아라는 81분에 마드리드가 2-1로 앞서나가는 득점을 기록했다. 84분,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가 레알 마드리드의 3번째 골이자 우승을 확정짓는 쐐기골을 기록했다. 디아라는 베른트 슈스터 신임 감독 체제에 임한 2007-08 시즌에도 리그 우승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고, 그는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아 페르난도 가고를 좀 더 전방으로 이동시켰다. 레알 마드리드는 무난하게 리그 우승을 거두었는데, 준우승을 차지한 비야레알보다 승점을 8점 더 얻었다. 디아라는 앞서 리옹 소속으로 리그 1을 2002-03 시즌부터 2005-06 시즌까지 우승한 것고,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2006-07 시즌과 2007-08 시즌을 우승한 것을 합쳐 6시즌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2008년 10월, 디아라는 차드와의 국가대표팀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해 들것에 실려나갔다. 그는 한 달을 쉬고 11월 말에 또 출전했지만, 무릎 부상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게 되었고, 결국 시즌 말까지 출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부재중인 와중에, 레알 마드리드는 포츠머스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를 대체하기 위해 라사나 디아라를 영입했고, 그는 디아라가 쓰던 6번을 가져갔다. 부상에서 복귀한 후, 디아라는 이어지는 두 시즌 간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에 8번 더 선발로 출전하는데 그쳤다. 2011년 1월, 디아라는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것으로 보도되었고, 그는 말라가를 비롯한 다수의 구단과 연결되었다. 모나코. 디아라는 2011년 1월 27일, 모나코와 계약하며 프랑스 무대로 복귀했다. 그는 0-0으로 비긴 마르세유와의 경기에서 첫 경기를 치렀다. 디아라는 모나코가 2010-11 시즌 후 리그 2로 강등되면서 모나코를 떠났다. 모나코를 떠난 후, 디아라는 한 동안 소속 구단이 없었고, 2011-12 시즌 전반기 동안 무소속으로, 중동행이 거론되기도 했으며, 잉글랜드 풋볼 리그 챔피언십의 던캐스터 로버스 행도 거론되었다. 풀럼. 디아라는 2012년 2월 26일, 프리미어리그의 풀럼과 계약했다. 그는 2011-12 시즌 말까지 남기로 합의했고 2012-13 시즌까지 연장할 권한도 있었다. 2012년 3월 4일, 그는 울버햄프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 출전해 5번째 골을 도와 5-0 승리를 견인했다. 3월 17일, 그는 0-3으로 패한 스완지 시티와의 경기에서 풀럼 소속으로 첫 선발 출전했다. 2012년 4월 7일, 그는 볼턴 원더러스와의 경기에서 풀럼 이적 후로는 첫 골을 기록했다. 11번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마르틴 욜 감독에 좋은 인상을 심은 디아라는 2012년 5월 17일, 1년 연장 계약을 맺어 2012-13 시즌 말까지 크레이븐 코티지에 남게 되었다. 디아라는 2012-13 시즌 후 풀럼에서 방출된 12명의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방출에도 불구하고, 마르틴 욜 감독은 디아라의 잔류에 긍정적인 견해를 보였고, 그가 여름에 재활을 계속할 수 있게 약속했다. 디아라는 2014년 3월 26일에 풀럼과 재계약하여 2013-14 시즌 말까지 활동하게 되었지만, 구단은 강등권 탈출에 실패했다. 은퇴 후. 디아라는 2016-17 시즌 전, 풋볼 리그 챔피언십의 브렌트퍼드 훈련에 임했고, 2016년 9월 20일에 구단의 2군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플레이스타일. "포포투"지에서 "디아라는 다른 선수에게 부족한 호전성, 전술성, 강인함, 그리고 절제력을 지니고 있다"라고 묘사했다. 사생활. 디아라는 이슬람 교도이다. 그는 이슬람 성월인 라마단 기간 동안 단식을 하며, 현재까지도 준수하는 것에 "모든 감독이 저의 결정을 존중했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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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중심이었던 언덕으로, 신전(예: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과 요새가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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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76 저격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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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어
호피어(Hopilàvayi,Hopi)는 미국 애리조나주 북동부에 사는 호피 족이 쓰는 유트아스테카어족 언어이다. 오늘날 상당수의 호피족은 호피어를 잊고 영어만 쓴다. 20세기 동안 호피어 사용자는 계속 줄어들어왔다. 1990년에 호피족의 70%에 해당하는 5000명정도가 호피어를 구사하였으며, 그중 호피어만 말하는 사람은 40명 밖에 안되었다. 많은 호피족 어린이들이 언어습득시기에 호피어를 접할 기회 없이 자라고 있으며 따라서 호피어는 소멸위기언어에 속한다. 호피 리터러시 프로젝트라는 호피족 모임이 호피어를 되살리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에모리 세카쾁테와가 그 일환으로 호피어-영어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언어학자인 벤자민 워프는 호피어를 배워서 그 지식이 그의 이론의 바탕을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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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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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급 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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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유성
금유성(1986년 11월 7일 ~ )은 KBO 리그 연천 미라클의 투수이다. 개명 전 이름은 '금민철(琴民鐵)'이다. 두산 베어스 시절.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2차 4라운드를 받아 입단하였다. 주로 중간 계투와 선발을 오고 가는 스윙맨 역할을 했고 2009년에 7승(4선발) 2패를 기록했다. 같은 해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 선발 등판해 인상 깊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확실한 선발 투수로는 자리잡지 못했다. 2009년 12월 30일에 당시 넥센 히어로즈 소속이었던 이현승을 중심으로 한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넥센 히어로즈로 이적했다. 넥센 히어로즈 시절. 트레이드 후 당시 구단주였던 이장석의 지시 아래 그가 1선발로 기용되며 선발 수업을 받았다. 2010년 3월 27일 롯데전에 선발 등판해 개막전 선발 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2010년 4월 18일 한화전에 선발 등판해 개인 첫 완봉승을 기록했다. 장원삼과 마일영이 트레이드로 이적해 그는 팀의 중요한 좌완 투수가 됐다. 두산 베어스로 트레이드된 이후 부진에 빠진 이현승과 달리 자신의 자리를 잡은 그는 다양한 경험을 거치며 시즌 초 팀 마운드의 감초같은 역할을 했으나, 처음으로 맞이한 풀 타임 시즌에 익숙하지 않아 그 해 7월 부진에 빠져 2군에 내려갔다. 오랫동안 2군에 있다가 시즌 막판에 1군에 복귀해 2010년 6승(모두 선발)(2018년 8선발승으로 갱신) 11패,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2011년에는 전 구단 상대 승리 투수라는 목표를 갖고 등판했으나 팔꿈치 수술을 받으며 시즌을 마감했다. 2011년 11월 17일 공익근무요원으로 입소했다. 2013년 11월 16일 소집 해제와 동시에 마무리 훈련에 참가했다. 2015년 8월 10일 삼성전에서 5.2이닝 무실점으로 1년 2개월 만에 승리 투수가 됐다. kt 위즈 시절. 2018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를 통해 이적하였다. 2018년 3월 28일 SK전에서 이적 후 첫 선발 승을 기록했다. 2020년 8월 13일에 방출됐다. 한국 독립야구 시절. 시흥 울브스 시절. 2021년에 입단하였다. 연천 미라클 시절. 2021년에 입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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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야망 (1987년 드라마)
《사랑과 야망》은 작가 김수현이 극본을 맡은 드라마이며, 1987년 1월 10일부터 1987년 12월 27일까지 방영된 문화방송 주말연속극으로, 《사랑과 진실》에 이어 76%의 기록적인 최고 시청률로 화제를 일으킨 작품이다. 기획 의도. 50년대에서부터 80년대에 이르는 30여 년의 세월 속에서 상반된 성격의 두 형제가 겪는 인생 역정, 야망, 사랑 등을 그리는 드라마 줄거리. 무능한 남편을 대신해 방앗간을 하며 세 명의 자식들을 키워 낸 태준모는 매일 낚시만 하는 남편을 한심하게 본다. 보증을 잘못서 빚독촉에 시달리던 태준부는 동사를 하고 모든 사실을 알게되지만 가족들은 빚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태준을 위해 그동안 자신을 짝사랑하던 동철을 찾아가 기한을 연기한 미자와, 동철에게 그동안 모아둔 80만 원을 건넨 태준모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고동철은 20만원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방앗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화가 난 태수는 고동철을 흠씬 패주고는 고향을 떠나 피신하여 살게 된다. 때문에 미자는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 혜주의 눈에 띄어 영화배우로 발돋움 한다. 미자와 태준은 재회해 결혼을 약속하지만 미자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치고, 태준모가 찾아와 결혼을 못하게 하자 미자는 충동적으로 김감독과의 결혼을 선택한다. 한편 이리저리 떠돌다 은환의 과수원에 정착한 태수와 은환 사이에는 사랑이 싹트고, 둘은 장래를 함께하기로 하지만 정자가 자신의 아이를 낳아 집으로 찾아오자 할 수 없이 불행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한편 급작스러운 김감독의 죽음에 미자는 망연자실하고 서로를 잊지 못하던 태준과 미자는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한다. 그 사이 선희는 불편한 다리를 수술하여 똑바로 걷게 되고 미용 기술을 배워 점차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태준과 결혼한 미자는 일을 그만두고 집에 있지만 일에만 매진하는 태준과 자신에게 냉랭한 시어머니 사이에서 힘들어한다. 태수와 애정없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던 정자는 결국 아이들을 두고 집을 나가고 태수는 은환과 재회해 둘은 바라던 결혼을 하게 된다. 태준이 회사를 위해 몸바쳐 일하는 동안 미자는 점점 정서적으로 병이 들고 둘은 결국 갈라서 각자의 삶을 살기로 한다. 힘든 결정을 한 태준에게 좌천이라는 시련이 찾아오지만 그 시련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회사 발전에 큰 도움을 준다. 임신을 한 미자는 태준모가 아이를 빼앗을까 임신사실을 쉬쉬하고, 아이가 큰 후 외국에서 돌아온 태준은 5년 만에 자신의 아이를 만나게 된다. 미자는 돌아온 태준과의 재결합을 꿈꾸지만, 배우 생활을 다시 시작해 술에 취하기 일쑤인 미자를 보고 화가 난 태준이 아이를 데려가 버리자 미자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재은과 결혼 약속을 한 태준은 주위사람들이 미자와의 재결합을 권유하지만 어차피 또 똑같은 생활의 반복일 뿐이라며 잘해나갈 자신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미자가 조명에 맞아 머리를 다치게 되자, 미자를 아직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태준은 재은에게 이별을 고한다. 수없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미자와 태준을 보고 태준모는 드디어 둘 사이를 인정하기로 하고 둘은 재결합한다. 태준이 재은을 두고 미자와 다시 재결합하자 회장은 화를 내며 태준의 사표를 받는다. 태수가 큰 돈을 들여 공사한 아파트는 거의 분양이 되지 않아 태수의 사업은 위기를 맞지만 마침 원유값이 오르는 바람에 고비를 넘기고 또 한 번 번창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태준은 1년이 다 되도록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지 못하지만, 그 무렵 회장이 태준을 불러들인다. 태준이 다시 회사에 나간 뒤로 미자는 점점 술이 늘며 우울증에 시달린다. 두 형제는 모두 성공 가도를 달리고, 남편 무덤을 찾은 태준모는 몸이 나아졌다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고 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죽음에 가족들은 모두 당황하고 슬퍼한다. 태준은 그 동안 어머니에게 역정을 내던 자신을 자책한다. 한편 태준은 회사에서 공로를 인정받고 회장 자리에 취임한다. 술에 취한 미자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태준의 야망을 비아냥거린다. 참다 못한 태준이 미자에게 손찌검을 하고 드라마는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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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 퍄툐르카
P-5 퍄툐르카()는 냉전기 소비에트 연방의 첼로메이 설계국에서 개발한 터보제트 순항 미사일이다. 이 미사일은 1959년에 배치되었다. 미사일의 기본형은 미국의 해안을 위협할 목적의 핵탄두 장착 잠수함 발사 관성유도 순항미사일이다. 미사일은 200이나 350KT의 핵탄두뿐 아니라 1000Kg의 고폭탄두를 장착할 수 있다. 마하 0.9 정도의 속도와 500 Km의 사정거리를 가지고 있고 원형공산오차는 3000m 정도이다. 후기형은 1000m의 원형공산오차를 갖는다. 첫 미사일은 프로젝트 644(위스키 트윈 실린더)와 프로젝트 665(위스키 롱빈) 잠수함에 장착되었다. P-5의 후기형식은 레이다 호밍 유도를 사용해 대함 미사일로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초기형은 1990년대 퇴역하였고, P-500 바잘트와 P-700 그라닛으로 대체되었다. 서방 정보기관에서 "SS-N-3"라고 부르는 다양한 변종의 터보젯 순항 미사일은 3가지 종류가 있었다. 극초기형, P-5는 SS-N-3c라 불렸고, 후기형은 SS-N-3a 와 SS-N-3b로 불렸다. 러시아는 이 미사일을 P-5 퍄툐르카, P-6, P-7, P-35 프로그레스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몇몇 자료에 따르면 'P-10'과 'P-25' 역시 존재하는 것 같다. 나토는 잠수함 발사 레이다 호밍형의 P-6을 SS-N-3A '샤독'으로 불렀다. 이들은 프로젝트 675급과 프로젝트 651급 잠수함에 실려 미국의 항공모함을 노렸다. 러시아측 자료에 따르면 P-5는 잠수함 발사형식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킨다급과 크레스타 I급 순양함에서 발사하는 레이다 호밍형은 P-35로 불렸다. P-7은 P-5의 장거리 형식이거나 P-6의 발전형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8륜 트럭에 실려서 이동하고 발사하는 지상 발사형식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지대함 형식의 P-5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배치. 미사일은 이들 함선에 배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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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스스무
오노 스스무( 1919년 - 2008년)는 일본의 언어학자이다. 가쿠슈인 대학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이후에는 모교의 명예교수를 역임했다. 고대 일본어의 음운, 표기, 어휘, 문법, 일본어의 기원 및 일본인의 사고 방식 등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이와나미 고어 사전》 편찬과, 일본어의 기원이 고대 타밀어라고 주장하는 일본어-타밀어 크레올가설로 널리 알려져있다. 주요 저서로는 《일본어의 기원》, 《일본어 문법을 고하다》, 《일본어의 형성》, 《일본어 연습장》 등이 있다. 업적. 고대 일본어의 권위자로 음운, 표기, 어휘, 문법, 일본어의 기원 등에 대하여 폭넓은 연구성과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이와나미 고어사전 편찬 및 일본어 기원을 인도 남부 타밀어에서 찾는 일본어-타밀어 크레올 가설이 유명하다. 오노 스스무가 일본어의 기원이 타밀어라고 주장한 것으로 인하여, 그의 죽음을 인도의 타밀나두주에서 크게 다루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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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용 미디어 플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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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골어 위키백과
벵골어 위키백과()는 위키미디어 재단에 의해 운영되는 벵골어 기반의 위키백과이다. 2007년 7월 16일 기준으로 현재 16000여 개 문서를 돌파했다. 기호는 bn이다.예를 들어 순다리는 뱅골어로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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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 백작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Leopold Joseph von Daun, 1705년 9월 24일 ~ 1766년 2월 5일)는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이다. 테아노 후작(Fürst von Teano) 작위도 가졌다. 배경. 위리치 필리프 폰 다운 백작(Count Wirich Philipp von Daun)의 아들로 빈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직자가 되려 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훌륭한 장군이었고, 자신 또한 천성이 군대에 맞았기에 군인의 길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1718년 다운은 그의 아버지 연대에 들어가 시실리아의 전역에 참가하였다. 이탈리아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4-35년)의 라인 전역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활약에 빠른 승진을 거듭해 "오베르스트"(Oberst;대령)가 되었다. 다운은 계속해 오스만 제국(1737-39년)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그의 우수성을 보여줘 어느덧 그는 "Feldmarschallleutnant"(소장)의 지위에 도달했다.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48년)에서 보여준 다운의 신중한 리더쉽은 훗날 그의 위대한 군사적 자질을 나타나게 된다. 그는 코투지츠와 프라하에 참가해 1743년 다뉴브 전역의 승리에서 케벤휠러(Khevenhüller)군의 전위부대를 맡았다. 1744년 케벤휠러의 후임자인 육군 원수 트라운 백작(Count Traun)은 다운의 재능을 높이 사 그에게 오스트리아 군대의 후위를 맡겨 프랑스와 프리드리히 대왕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 다운은 호헨프리드베르크와 수어의 전투에서 중요한 지휘를 맡았고, 그 해 1745년 중장의 지위에 올랐다. 그 후 그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보내져 발 전투에 참전했다. 다운은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고, 황금 양모 기사단과 빈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754년 그는 육군 원수로 승진하였다. 7년 전쟁. 7년 전쟁에 앞서 평화의 휴식기간 동안 다운은 오스트리아 군의 재편성 계획에 고심하며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것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것은 주로 그의 노력으로 1751년 비너노-이슈타트(Wiener-Neustadt)에 설립된 테레사 사관 학교(Theresian Military Academy)에서 진행되었다. 다운은 전쟁의 첫 전역에서 소극적으로 움직였지만 1757년 프라하를 구제하면서 군의 우두머리로 떠오르는 위치가 되었다. 다운은 1757년 6월 18일 콜린 전투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그의 경력에 첫 번째로 프리드리히를 패배시켰다. 이 찬란한 공훈을 축하하기 위해 여왕은 즉시 그녀의 이름을 새긴 군사 훈장을 제정해 다운은 첫 대십자 훈장의 수여자가 되었다. 브레슬라우의 승리와 프로이센에 대한 추격을 맡을 자격이 되어 지휘관으로써 2번째 위치에 있게 된 다운은 부담을 줄이기 위해 프라하에서 카를 대공의 군대와 함께 군을 안정시키기 위해 합세하였다. 프리드리히는 로이텐에서 그 시대 가장 찬란한 승리를 얻어 다시 한번 영광을 재현했다. 다운은 야전에 보내졌으나, 대참사에 대한 책임은 없었다. 곧 카를 공은 자신의 지휘권을 사임하고, 그 자리에 다운을 지명하게 되었다. 다운은 1758년 전역의 시작과 함께 전쟁의 작전행동에서 프로이센을 궤멸시킬 수많은 기회를 지나친 조심 때문에 놓쳤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의 불 같은 공격에 차갑게 저항하면서 가장 안정되게 유지하였다. 1758년 소장 라우돈은 다운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 올뮈츠(돔마소프 전투)의 공방전에서 왕의 군대를 상대로 급부상해 이후 그 해 다운 자신도 놀란 호크키르히 전투에서 라우돈은 프리드리히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겨 주었다. 다음해 전쟁의 작전 행동은 계속되어 11월 20일과 21일 막센에서 핑크(Finck) 장군의 전군이 포위당해 결국 프로이센군은 다운에게 항복했다. 이 같은 성공은 다음해 리그니츠에서 라우돈이 패배 할때까지 균형을 유지하였다. 전투의 패배는 다운의 꾸물거림이 원인이었고, 이후 토르가우 전투에서 대패배도 다운의 문제였다. 이곳에서 다운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건강 회복을 위해 빈으로 돌아왔다. 다운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휘를 계속했고, 그 후 제국군의 개편에 온 힘을 기울였다. 1762년 다운은 호프크리에그라스트(Hofkriegsrath;제국 군사회의)의 의장에 지명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령에 따라 그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이 오스트리아의 교회에 발타자르 페르디난트 몰(Balthasar Ferdinand Moll)에 의해 세워졌다. 비문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그녀 국가의 구조자"(saviour of her states). 1888년 오스트리아 보병 제56연대가 그의 이름에서 명명되었다. 다운 장군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그의 행동에서 보인 꾸물거림에 대한 비판이었으나, 경계심은 프리드리히와 유사한 장군의 또 다른 일면이었기에 잘못된 것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신속함을 예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무능하게 승리를 이용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쉽게 용서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사촌은 폼발 후작(Marquis of Pombal)과 결혼해 포르투갈의 정치가 로써 기록되었다. 더 보기. See "Der deutsche Fabius Cunctator, oder Leben und Thaten seiner Excellentz, des Herrn Leopold Joseph Maria Reichsgrafen von Daun ... " (S.l.: s.n., 1759-1760), 와 당시 시대의 전쟁을 나누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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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골어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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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번 라이서첵
에반 프랭크 라이사첵(, 1985년 6월 4일 ~ )는 미국의 남자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2009년 세계 선수권 챔피언이자 2005, 2006년 4대륙 선수권 챔피언, 2009년 그랑프리 파이널 챔피언, 2007-2008 미국 선수권 챔피언, 2010 밴쿠버 동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다. 경력. 어린 시절. 라이서첵은 8살에 피겨 스케이팅을 시작했다. 원래는 하키를 하기 원했으나 그의 어머니의 권유로 누나인 로라 라이서첵과 피겨스케이팅 강습을 받으면서 피겨선수의 세계로 입문하게 되었다. 1996년, 라이서첵은 11세 미만의 선수들만이 참가하는 미국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였다. 1999년, 13세이하만이 참가하는 미국 선수권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1999-2000년 시즌, 라이서첵은 주니어 선수로 국제 경기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2개의 주니어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하여 첫 대회는 7위, 두 번째 대회에서는 2위를 차지했다.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3위에 입상하였다. 2000년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에서는 14세의 나이로 주니어 챔피언에 올랐다. 2000-2001년 시즌, 라이서첵은 주니어 그랑프리 두 대회에서 모두 2위에 입상하였고,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8위로 부진하였다. 2001년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에서는 15세였으나, 시니어(Senior, 성인) 부문에 출전하였고 12위에 머물렀다. 이후 보결선수로 2001년 세계 주니어 선수권에 첫 출전하여 2위에 올랐다. 2001-2002년 시즌, 라이서첵은 갈비뼈 골절의 부상으로 인해 주니어 그랑프리에 출전하지 못했다. 2002년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에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12위에 머물렀으며, 2002년 세계 주니어 선수권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 2002-2003년 시즌, 라이서첵은 주니어 그랑프리에 출전하여 두 대회에서 모두 2위에 입상하였고,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5위를 차지했다. 2003년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에서는 7위를 차지하여 2003년 4대륙 선수권과 주니어 선수권 출전 자격을 얻었다. 4대륙 선수권에서는 10위를 차지했으며 주니어 선수권에서는 2년 전과 같은 2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2003-2004년 시즌, 고등학교를 졸업한 라이서첵은 새로운 코치로 프랭크 캐롤을 선택했다. 라이서첵은 주니어 그랑프리 두 대회에 출전하여 두 번 모두 금메달을 차지했고,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도 우승을 차지하여, 첫 국제무대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2004년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에서는 5위에 입상하여, 4대륙 선수권과 세계 주니어 선수권 출전자격을 얻었다. 4대륙 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따냈으며 이것은 라이서첵의 첫 시니어 국제대회 메달이었다. 이어 열린 세계 주니어 선수권에서는 은메달을 차지했다. 이것은 2002, 2004년에 이은 라이서첵의 3번째 주니어 선수권 은메달이었다. 2004-2005년 시즌. 19세의 라이서첵은 본격적으로 시니어 국제 대회에만 출전하게 되었다. 라이서첵은 두 개의 시니어 그랑프리 대회에 출전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엉덩이 부상을 가진 채로 출전한 2004년 스케이트 아메리카에서는 5위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2004년 컵 오브 러시아는 기권하였다. 2005년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에서는 동메달을 따내며 4대륙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 출전 자격을 얻었다. 4대륙 선수권에서는 국제 대회 데뷔 이후로 첫 금메달을 따냈으며, 세계 선수권에서는 3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시니어 세계 선수권에 처음으로 출전하여 메달을 딴 선수는 2002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알렉세이 야구딘, 2006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예브게니 플루셴코 이후로 사상 세 번째였다. 2005-2006년 시즌. 라이서첵은 2005년 스케이트 아메리카에 출전하여 2위를 차지했으며 2005년 NHK 트로피에서도 역시 2위를 차지하여, 그랑프리 시리즈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스케이터 6명만이 출전하는 그랑프리 파이널의 출전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엉덩이 부상으로 인해 파이널을 기권하였다. 2006년 1월에 열린 미국 선수권에서는 2위에 입상하여 2006년 동계 올림픽과 2006년 세계 선수권의 출전권을 획득했다. 2006년 동계 올림픽에서는 쇼트프로그램 10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때 그는 위염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스케이트에서 큰 실수 없는 연기로 좋은 점수를 얻으면서, 종합 4위의 성적을 거두었다. 2006년 세계 선수권에서는 2005년과 마찬가지로 3위에 입상하였다. 이 대회에서 라이서첵은 처음으로 4회전 점프를 성공시켰다. 2006-2007년 시즌. 라이서첵은 2006년 스케이트 아메리카에 출전하여 2위, 2006년 컵 오브 차이나에서 우승을 차지하여, 작년에 이어 그랑프리 파이널의 출전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파이널에서 쇼트프로그램이 끝난 후 엉덩이에 다시 부상을 입어 프리스케이트를 기권하였다. 2007년 1월에 열린 미국선수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것은 라이서첵의 미국선수권 첫 우승이었으며, 이 대회 성적으로 4대륙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의 출전 자격을 얻었다. 4대륙 선수권에서는 2005년 대회에 이어 두 번째로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어 열린 세계 선수권에서는 5위에 머물렀다. 2007-2008년 시즌. 라이서첵은 2007 스케이트 아메리카에 출전하여 2위, 2007년 컵 오브 차이나에서는 3위를 차지하며 3년 연속으로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랑프리 파이널에서는 동메달의 성적을 거두어, 처음으로 그랑프리 파이널 시상대에 오를 수 있었다. 2008년 1월에 열린 미국선수권에서는 라이벌 조니 위어를 누르고 2년 연속 미국 챔피언의 자리에 올라, 4대륙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 출전권을 획득했다. 한국 고양시에서 열린 2008년 4대륙 선수권에서는 역대 개인 최고 성적으로 3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세계 선수권을 앞두고 라이서첵은 훈련 중에 넘어져 팔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으며 결국 세계 선수권 출전을 포기하였다. 2008-2009년 시즌. 라이서첵은 2008년 스케이트 아메리카에 출전하여 3위, 2008년 스케이트 캐나다에서는 18세의 신예 패트릭 챈에게 밀리며 역시 3위에 머물렀으며, 이로 인해 그랑프리 파이널에 출전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2009년 1월에 열린 미국선수권에서도 부진함을 보이며 3위에 입상하여, 4대륙 선수권과 세계 선수권의 출전자격을 얻었다.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열린 4대륙 선수권에서는 2위를 차지하였으며, 이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09년 세계 선수권에서는 우승을 차지했다. 이것은 라이서첵의 첫 세계선수권 챔피언 타이틀이자, 미국 남자 피겨스케이팅에서 16년 만의 세계 선수권 금메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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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블루
《퍼펙트 블루》(Perfect Blue)는 곤 사토시 감독의 1998년 애니메이션 영화이다. 개요. 다케우치 요시카즈의 동명 소설을 기초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내용은 상당히 다르다. 일본 인기 아이돌 그룹 챰!(CHAM!)의 일원인 키리고에 미마가 배우로서의 변신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심리 스릴러물이다. 변신 과정에서 겪는 정신적 혼란을 몽환적 분위기로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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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
프랑수아 에티엔 크리스토프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Christophe Kellermann, 1735년 5월 28일~1820년 9월 23일)은 프랑스의 군인이다. 1804년 프랑스 육군원수로 임명되었으며, 1808년 발미 공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7년 전쟁과 프랑스 혁명 전쟁, 나폴레옹 전쟁을 모두 경험한 인물이었다. 아들인 프랑수아 에티엔 켈레르만 역시 유명한 기병장군이었다. 생애. 초기 생애.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은 1735년 5월 28일 스트라스부르에서 후일 시의원이 되는 장 크리스토프 켈레르만(Jean Christophe Kellermann)과 마리 마들렌 뒤르(Marie Madeleine Dürr)의 7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켈레르만 가문은 본래 작센 출신의 상인 가문으로 17세기 말엽 스트라스부르에 정착했고, 켈레르만의 조부 대에 귀족이 되었다. 켈레르만은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지만, 행정관이나 법률가보다 군인이 되기를 바랐다. 켈레르만은 로벤달 연대(Régiment de Lowendal)에 사관후보생으로 자원입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 1752년 소위로 임관한 그는 7년 전쟁 때 프로이센군에 맞서 용맹하게 싸웠으며, 종전 후에는 외교 업무를 맡아 폴란드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서 켈레르만은 1771년 바르 동맹군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장교단의 일원으로 선발될 수 있었으며, 크라쿠프를 탈환하고 티니에츠에서 아군의 퇴로를 엄호하는 데 기여하여 생루이 훈장 슈발리에(chevalier)를 수훈받았다. 그는 1788년에 준장(maréchal de camp)으로 진급함으로써 나폴레옹이 임명한 26인의 원수들 중 프랑스 혁명 이전에 장성으로 진급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전쟁기.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켈레르만은 혁명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1791년 2월 오랭 주 주둔군사령관, 4월에 바랭 주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켈레르만은 혼란스러운 알자스 지방을 통제하고 란다우 요새를 훌륭하게 재정비한 공적으로 1792년 3월 소장으로 진급했다. 8월 26일, 그는 니콜라 뤼크네 원수의 뒤를 이어 중부군(Armée du Centre)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9월 19일 북부군(Armée du Nord)사령관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와 함께 발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발미 전투에서의 승리는 그를 혁명전쟁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었고, 그의 군 경력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공이 되었다. 그러나 11월 14일, 켈레르만은 명령불복종 및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군사법정에 기소되었고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알프스군(Armée des Alpes)사령관직으로 밀려났다. 그는 1793년 9월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서 사르데냐 왕국군을 무찌르고 사보이를 탈환했지만, 11월에 자코뱅파에 의해 불충성 혐의로 다시 기소되어 13개월 동안 수감 생활을 했다. 1794년 7월 자코뱅 정권의 몰락으로 석방된 켈레르만은 알프스군 사령관으로 복직했다. 1797년 9월 13일 알프스군이 해체된 이후 그는 국민위병과 서부군(Armée de l'Ouest)의 기병총감, 바타비아군(Armee de Batavie) 임시사령관 등의 직책을 역임했으며, 브뤼메르 18일 쿠데타 이후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상원의원이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기. 나폴레옹은 켈레르만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켈레르만이 용맹하고 활동적이지만 사령관이 될 자질은 없다고 보았다. 켈레르만 또한 나폴레옹은 내전을 통해 권력을 잡은 야심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새로운 체제의 수립을 위해 군부 내의 다양한 세력과 혁명전쟁의 공신들을 포섭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켈레르만도 가문의 번영과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는 나폴레옹에게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04년 5월 19일, 나폴레옹은 켈레르만을 제국 원수로 임명하고, 요하니스베르크의 장원과 콜마르 의원령(sénatorerie) 등 많은 토지를 하사했다. 1808년에는 발미 공작으로 봉해졌다. 나폴레옹 전쟁기에, 고령의 켈레르만은 예비군 사령관과 같은 후방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그는 1805년에서 1809년 사이 예비군 제 3군단(Le 3e corps de réserve), 에스파냐 방면군 예비군(Armée de réserve d'Espagne), 라인군 예비군(Armée de réserve du Rhin), 북부군 예비군(Armée de réserve du Nord)사령관을 연이어 맡았다. 이후 건강 문제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812년 제 25•26 군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13년 독일-프랑스 전쟁이 시작되자 켈레르만은 라인군 예비군 사령관이 되어 동부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그는 라이프치히 전투 직후 마인츠와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상병들을 옮기는 일을 담당했으며, 메스에 모여든 패잔병들을 통솔하여 샬롱앙샹파뉴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러나 1814년 1월, 나폴레옹은 다른 원수들에게 현장 지휘를 맡기고 켈레르만은 파리로 돌려보냈다. 부르봉 왕정복고와 말년. 1814년 4월 1일, 켈레르만은 상원에서 나폴레옹의 퇴위에 찬성표를 던졌다. 루이 18세는 그를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했다. 백일천하 때 아들인 프랑수아 에티엔 켈레르만이 나폴레옹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워털루 전투에 참전한 것과 달리, 늙은 원수는 조용히 자택에 칩거했다. 또한 나폴레옹이 완전히 몰락한 후에는 체포된 미셸 네 원수의 사형 판결에 동의하기도 했다. 몇몇 왕당파들로부터 지속적인 위협을 받기는 했지만, 켈레르만은 왕정복고 시대에 자신의 원수 칭호와 연금, 발미 공작위를 모두 유지할 수 있었다. 1820년 9월 13일, 켈레르만은 파리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발미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발미 전투 기념비에 안장되었다. 가족관계. 켈레르만은 1769년 마리 안 바르베(Marie Anne Barbé)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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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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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초대 바그람 공, 뇌샤텔과 발랑쟁 주권공(Louis Alexandre Berthier, 1er prince de Wagram, prince souverain de Neuchâtel et Valengin, 1753년 11월 20일 ~ 1815년 6월 1일)은 프랑스의 군인이다. 1804년 프랑스 원수, 1808년 부무관장(vice-connétable)으로 임명되었으며, 나폴레옹의 참모총장(chef d'état-major)으로서 황제를 정치적, 군사적으로 보좌했다. 생애. 초기 생애.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는 1753년 11월 20일 베르사유에서 지형측량관(ingénieur-géographe) 장바티스트 베르티에(Jean-Baptiste Berthier)중령과 그의 첫 번째 아내 마리 프랑수아즈 륄리에 드 라세르(Marie Françoise L'Huillier de La Serr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5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그 중 3명이 형과 함께 군인이 되었다. 베르티에는 1764년 왕립 메지에르 공학교(’École royale du génie de Mézières)에 입학하여 수학과 공학, 지리학 등을 배웠고 1766년 학교를 졸업한 뒤 지형측량관이 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너무 어려 1770년에 중위로 정식 임관했다. 1780년, 베르티에는 로샹보 백작이 지휘하는 미국독립전쟁 지원군의 일원으로 아메리카에 파병되어 군사 경험을 쌓았다. 프랑스 혁명전쟁기. 프랑스 혁명전쟁기에는 측량 겸 참모장교로 복무했으나, 1793년 3월에 방데 지방으로 파견되었다가 귀족이라는 이유로 4개월 만에 해임당하고 지방에 은둔하게 되었다. 그 후 알프스 주둔군과 이탈리아군 사단장과 참모총장으로 재등용되어 이탈리아로 진격해 1798년 2월 이탈리아 로마를 점령하고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가담했다. 나폴레옹 전쟁기. 1806년 나폴레옹은 그의 충성심을 인정하고 뇌샤텔 대공 자리에 앉히고 1809년에는 바그람 공 칭호를 수여했다. 1812년 러시아 원정 당시에도 나폴레옹 곁에 있었으며, 나폴레옹 퇴위 후 루이 18세의 신하가 되었다. 그 후 은퇴하여 바이에른주 밤베르크에서 머물다 자택 2층 창문(upstairs window)에서 떨어져 죽었다. 비밀 조직의 일원에 의해 타살되었는지 아니면 스스로 창밖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지 명확한 사망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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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동역
가동역(佳洞驛)은 경상북도 예천군 유천면 가리에 있던 경북선의 철도역이다. 2001년에 폐역되었으며, 폐역 후에도 플랫폼이 남아있었으나 2008년 선로 개량으로 인해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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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 1763년 5월 7일 ~ 1813년 10월 19일)는 폴란드의 군인이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나폴레옹이 임명한 26명의 원수 중 한 명이며, 나폴레옹 프랑스군 내에서 폴란드 군대를 이끌었던 폴란드인 장군이다. 그러나 포니아토프스키가 다른 원수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처음부터 왕족이었다는 점이다. 출생에서 오스트리아군 복무시절까지. 포니아토프스키는 오스트리아의 빈에 있는 킨스키 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폴란드의 마지막 국왕이 되는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형제였고, 어머니는 당대의 여걸 마리아 테레지아의 궁정 출신 여인이었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육군 원수로서 복무하고 있었다. 포니아토프스키가 10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죽었고, 숙부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가 후견인이 되어 둘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빈에서 나고 자랐지만 어머니가 있던 프라하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숙부가 살고 있는 바르샤바에서도 지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군 경력은 오스트리아군에서 복무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1780년에 포니아토프스키는 대위로 임관했고, 1786~1788년에 걸쳐 진급, 1788년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일 시에는 대령으로 진급해 있었다. 그 해에 그는 당시의 오스트리아 국왕 요제프 2세의 막료로 종군했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눈부신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1788년 4월 25일에 사바크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으나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에 의해 구출되었다. 폴란드군으로 이적하다. 그가 26세 되던 해,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와 폴란드 의회의 요청으로 폴란드군 장교로 임관했다. 이 해에 그는 오스트리아군 내의 타데우스 코쉬츄스코를 비롯한 폴란드인 동료들과 함께 폴란드로 이주했고, 1789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가 재편한 폴란드군에서 그는 같이 왔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소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우크라이나 방면에 있는 군대의 사단장으로 부임했으며, 이때의 경험으로 포니아토프스키는 폴란드군의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함을 느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열성적인 개혁 지지자였고, 그는 친구들과 함께 폴란드 의회에 개혁의 필요성을 건의했으나 의회는 그것을 들어주지않았다. 그러자 포니아토프스키는 무력을 동원해 개혁안과 관련된 법안을 확실하게 통과시켰다. 1792년 5월 6일에 포니아토프스키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우크라이나 방면의 폴란드군을 담당하게 되었다. 러시아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어를 요청받은 조제프는 오스트리아군 출신의 폴란드인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군 저지를 목표로 분투했다. 그러나 수적으로도, 물적으로도 압도적인 우세를 점한 러시아군을 상대로 부득이하게 후퇴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지만 아군에 유리한 상황이면 그것을 놓치지 않고 노력한 끝에 지엘렌스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압도적인 공세는 계속되었고, 결국에는 바르샤바까지 러시아군이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군이 반격하기 위해 출성하는 그때, 포니아토프스키의 앞에 특사가 나타났다. 그의 숙부가 러시아와의 조약에 서명했고, 러시아의 보호령인 타르고비카 연방에 가입하며, 폴란드군은 더 이상 러시아군에 대해 적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모두가 절망했고, 몇몇은 포니아토프스키에게 쿠데타를 일으키자 주장했으나 그는 그것을 무시했다. 그 후 그는 실망한 많은 폴란드 장성들과 함께 퇴역하여 폴란드군을 떠났다. 폴란드를 떠나 빈으로 돌아온 포니아토프스키는 조국을 바보로 만든 원흉인 타르고비카 연방의 지도자 스체니 포토키에게 반복해서 결투를 신청했다. 하지만 러시아 차르는 그가 폴란드로부터 사라지길 원했기에, 겁먹은 숙부는 그에게 압력을 가해 여길 떠나라고 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결국 빈을 떠나 서유럽을 떠돌 수 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도중, 프랑스에서 그는 프랑스 혁명의 끔찍한 사건들을 보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코시치우슈코 반란. 1792년에 그는 숙부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편지를 썼는데, 내용은 국가적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킬 것을 권고하는 것이었다. 아직 싸울 수 있는 힘이 남아있는 폴란드는 국가를 위해 궐기하자고 한다면 그에 응하여 귀족들이 앞장서서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794년에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는 조카에게 편지를 썼고, 그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였다. 포니아토프스키는 그의 전 부하인 코시치우슈코의 아래에서 복무하게 되었고, 이 대규모 반란에 그의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코쉬츄스코로부터 리투아니아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제안받았지만, 언제 변심할지 모르는 숙부로부터 떨어질 수 없었던 그는 거절하고 대신 다른 장교를 추천했다. 그 후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주변에서의 크고작은 전투에 참여하며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밀고당기는 싸움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반란은 실패로 끝났으며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에서 사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의 영지는 몰수당했지만, 러시아에서는 그런 그를 자국 군대의 장교로 삼으려 노력했다. 러시아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무시했고, 러시아 차르와 귀족들의 위압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끝내 그것을 무시하고 1795년 빈으로 이사했다. 그 때 또다시 코쉬츄스코는 마지막 반란을 일으켰다. 다시 군대로. 1796년 예카테리나 2세가 서거한 후, 파벨 1세는 그의 영지를 돌려주고 그를 데려오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포니아토프스키는 그것을 요양을 핑계로 거절했다. 그러나 1798년에 전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서거했다. 가장 친했던 숙부의 죽음이기에, 그는 숙부의 장례식에 참여했고, 몇 달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다. 폴란드로 돌아온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의 그의 영지에 머물며 1806년까지 쭉 평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1802년에는 그의 숙부의 계승을 문제로 베를린에 다녀왔으며, 그곳에서 프로이센 왕가로부터 진심어린 환대를 받았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대가 승리하자, 폴란드 내의 프로이센 점령지가 해방되었다. 이 때, 포니아토프스키는 프로이센 국왕 프레드리히 빌헬름 3세로부터 바르샤바의 행정을 떠맡게 되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와 인근 지역의 주둔군을 강화시켰다. 1806년 말에 조아생 뮈라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했고, 뮈라와 그의 측근의 권고로 프랑스군에 임관하게 되었다. 1807년 7월 나폴레옹에 의해 바르샤바 공국이 탄생했고,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공국의 전쟁장관과 바르샤바 주 방위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당시에는 나폴레옹이 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지만, 1808년에 다부의 휘하에서 치러진 여름 전역 당시 선보인 훌륭한 지휘로 인해 1809년에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나폴레옹 전쟁과 포니아토프스키. 1809년 봄에는 오스트리아 전쟁에 참가하여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페르디난드 카를 요제프 대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며, 배에 달하는 군세를 상대로 버텨냈다. 포니아토프스키 자신이 바르샤바를 사수하고 있는 동안 다른 부대를 이용한 전략적인 기동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남부 폴란드를 해방시켜 나갔다. 그해 10월, 오스트리아와 맺어진 화의로 인해 크라쿠프를 비롯한 남부 폴란드가 해방되었고, 포니아토프스키를 비롯한 폴란드인들은 환호했다. 1811년 4월에 포니아토프스키는 바르샤바 공 작센의 프레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를 대신하여 파리로 갔고, 나폴레옹 2세의 세례식에 참관했다. 그는 거기서 4달간 머물렀고, 황제와 그의 장군들과 함께 러시아 공략의 준비를 했다. 그는 거기서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남부 루트로 갈 것을 건의했지만 나폴레옹은 그것을 기각하고 본래 구상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주 퇴짜놓은 것은 아니었던지,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 군단이 그 루트를 통해 당초 계획을 보조하도록 했다. 폴란드군은 포니아토프스키가 이끄는 10만의 군대를 파견, 나폴레옹의 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지휘하에 놓이게 되었으나 계획이 틀어져서, 제롬은 포니아토프스키의 군대를 대육군의 좌익을 맡도록 했다.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군은 전위대로서 훌륭히 싸웠고, 모스크바로 전진하면서 맞닥뜨린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나갔다. 스몰렌스크에서는 단독으로 그의 군대를 지휘, 도시 내로 돌입했고, 보로디노에서는 우티차 고지에서 해질녘까지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5군단을 지원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모스크바에 가장 먼저 입성한 것도 포니아토프스키의 폴란드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직후 발생했고, 나폴레옹은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서 싸우지 못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귀환해야만 했다. 포니아토프스키는 이때 후위를 맡아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비야즈마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그러고서도 그는 며칠 동안 더 지휘를 했으나 결국에는 베레지나에서 러시아군의 포로로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해 12월 12일, 다시 바르샤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말년. 그리고 1813년, 부상이 나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빠르게 폴란드군을 재정비하고 전쟁준비를 서둘렀다. 다른 폴란드 지도자들이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이 흔들리고 있을 때도, 포니아토프스키는 끝까지 나폴레옹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다. 2월 5일에 러시아군이 침공해오자, 포니아토프스키는 군대를 이끌고 바르샤바를 떠나 크라쿠프로 이동했고, 결국에는 8군단이 있는 보헤미아로 갔다. 보헤미아에서 프랑스군과 합류한 포니아토프스키는 라이프치히를 향해 이동, 뢰바우와 제틀리츠에서 파흘렌 장군이 이끄는 동맹군을 격파하며 이동했다. 그간의 훌륭한 전공으로, 라이프치히 전투 중 프랑스 원수로 임명되었고 전투 종반에는 프랑스군의 후퇴를 엄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포니아토프스키는 다른 지휘관들과 함께 후퇴를 엄호하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폴란드군의 병력을 상당수 잃었다. 반수 이상 줄어든 폴란드군을 지휘하면서, 공세가 완화되었을 즘에 천천히 철수를 감행했다. 그러나 다리가 붕괴되면서 다수의 프랑스 병사들과 함께 그는 엘스터 강에 빠져 죽고 말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크도날은 헤엄쳐서 살아남았다. 다리가 끊겨서 고립된 우디노는 결국 항복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본래 퇴각시 모두가 엘스터 강을 건너고 다리를 끊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다리를 끊는 것을 담당한 몽포르 대령이 다리 끊는 타이밍을 잘못 잡았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다가 한참을 기다려도 꾸역꾸역 오고 있는 것을 본 그는 우물쭈물대다 "작전대로 가야지"라는 생각에 아직 포니아토프스키가 다리 위에 있는 상태에서 다리를 끊어버렸으니 그 위에 있던 포니아토프스키는 추락해서 엘스터 강에 빠져 익사했고 그 뒤를 따르던 5000명이 넘는 폴란드 병사들은 전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향년 50세. 사후. 그의 유해는 1817년 폴란드로 이송되었고, 크라쿠프의 바벨 언덕에 있는 대성당에서 그는 그의 옛 동료이자 부하였던 타데우시 코시우치우슈코와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옆에 묻혔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그저 연인과의 관계에서 낳은 아이들밖에 없었다. 기타.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의 휘하 장군으로 대우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동등한 황제로서 대우해줬고 더군다나 나폴레옹은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포니아토프스키를 자신에게 바치는 충성과 예우와 동일한 충성과 예우를 갖추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이에 크게 감동받은 포니아토프스키는 나폴레옹을 위해서라면 죽을 힘을 다했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때도 폴란드 군대를 이끌고 참가하여 나폴레옹을 위해 정말 열심히 싸웠다. 그의 용맹은 조아생 뮈라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을 만큼 대단했다. 그의 원래 용맹이라기 보다는 그가 이만큼 죽을 힘을 다했다는 것이 맞다.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사랑했고, 폴란드 독립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그는 폴란드 내에서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는 진심으로 순수하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불꽃처럼 살다 간 영웅 중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폴란드인들에게 있어 포니아토프스키는 구국의 영웅으로 비춰지고 있다. 당시 포니아토프스키가 전사했을 때, 그의 죽음은 당대의 모든 폴란드인들에게 있어 거의 재앙에 가까운 충격이였다. 훗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폴란드 망명 정부 소속 군대에서 포니아토프스키의 이름을 딴 폴란드 공군 폭격기 편대가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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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제1011호선
지방도 제1011호선(가야 ~ 대양선)은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가야사거리와 합천군 대양면 대양 교차로를 잇는 경상남도의 지방도이다. 합천군 대양면, 의령군 북동부 면지역과 함안군 중심을 잇는 주요도로로, 함안군 법수면의 동부지역을 통과하며 함안군 가야읍의 함안 나들목에서 남해고속도로와 교차하는 것이 특징이다. 전 구간 왕복 2차로로 구성되어 있다. 2007년부터 건설교통부에서 지방도 노선번호 일관성을 위한 노선번호 체계 개선에 의해 지방도 제907호선이 이 지방도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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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드 듀 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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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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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스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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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 요헤이
고노 요헤이(, 1937년 1월 5일 ~ )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요약. 가나가와현 히라쓰카시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였다. 중의원 의원, 중의원 의장, 부총리, 외무 대신, 내각관방장관, 과학기술청 장관, 자유 민주당 총재, 신자유클럽() 대표를 역임했으며, 일본 헌정 사상 가장 오랫동안 중의원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내각관방장관을 맡고 있던 1993년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최초로 인정하는 고노 담화를 발표해 화제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유민주당의 정치인을 지낸 고노 이치로(河野一郎)이며, 장남은 현재 국무대신인 고노 다로(河野太郎), 숙부는 참의원 의장을 지낸 고노 겐조(河野謙三)이다. 2009년 8월 23일, 대한민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을 위해 일본을 대표하여 한국을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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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블류헤르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1889년 12월 1일 - 1938년 11월 9일)는 러시아 내전에서 활약한 소비에트 연방 군인이다. 그는 대숙청에 희생된 최고급장군의 한 명이다. 초기이력. 현재 야로슬라블 주인 바르쉰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은 독일식이지만, 독일계는 아니고, 그의 가족이 소작하던 지주가 19세기 프로이센의 명장 블뤼허(Blücher) 장군의 이름을 따서 붙여주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전에는 공장 노동자를 지내다가, 1914년 러시아 제국군에 들어갔고, 부사관으로 종군하였다. 1916년 그는 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갔고, 1917년 사마라에서 10월 혁명에 참가하였다. 러시아 내전. 1917년 11월, 그는 볼셰비키 적위대의 지휘관으로서 혁명에 반대하는 두토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1918년에는 새롭게 창건된 볼셰비키 군대인 붉은 군대에 참여하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러시아 내전에서 가장 유능한 볼셰비키 지휘관 중의 하나였고, 각지에서 반혁명군을 격파, 진압하였다.1918년에는 8월과 9월 사이에는 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1500km를 40일 만에 주파하여 붉은 군대 주력에 합류하였고, 이 공적으로 적기 훈장을 받았다. 그는 이 훈장을 통틀어 4번씩 받기도 하였다. 그는 제51사단의 사단장이 되었고, 1920년 11월에 우랑겔이 이끄는 반혁명군을 격파하였다. 장제스 군사고문. 러시아 내전 이후, 그는 극동 군관구로 파견되었다. 1924부터 1927년까지 블류헤르는 중국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여기서 "갈렌(Galen)"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면서 장제스를 보좌하였다. 그는 여기서 국민당의 북벌을 지도하였고, 후에 인민해방군의 가장 유능한 지휘관의 하나가 되는 린뱌오를 교육하였다. 동방의 왕자. 그는 귀국하여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후 다시 극동으로 전근되어 극동특별적기군 (OKDVA)의 사령관이 되었다. 하바로프스크에 근거지를 둔 그는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하여 "동방의 왕자"라고 불릴 정도로 소련내에서 명성이 있었다. 이 지역은 일본이 군사적으로 계속 확장을 노렸기 때문에 소련의 안보상 아주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1929-1930년, 만주를 사실상 지배하던 장쉐량이 소련의 만주 철도이권을 회복하려고 하여 중화민국과 소련사이에 봉소분쟁이 일어났다. 블류헤르는 만주를 침공하여 장쉐량이 지휘하던 국민혁명군 동북군을 단숨에 격파하고 많은 포로를 획득하였다. 이것으로 그는 다시 적기훈장을 받고, 1935년 붉은군대에 계급이 부활하자 투하체프스키 등의 4명과 함께 소련방원수에 임명되었다. 1938년 7월과 8월 사이에 그의 부대는 두만강 유역의 조선-소련 국경에서 일본군과 충돌하여 장고봉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일본군을 패퇴시키기는 했지만, 소련군의 피해도 컸다. 숙청 및 처형. 극동군관구의 중요성 때문에 블류헤르는 1937년부터 벌어진 대숙청의 영향권에 벗어난 듯이 보였다. 그는 사형판결이 났던 투하체프스키의 군사재판에서 재판장의 한명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8년 8월 그는 장고봉 사건에서 부적절한 지휘를 했다는 죄목으로 비난되어 사령관직에서 해임당했다. 10월 22일 그는 체포되었고, 일본의 간첩혐의를 받았다. 그해 6월 내무인민위원회 요원이었던 류슈코프의 일본 망명이 그의 체포에 일정부분 작용했다. 블류헤르는 감옥에서 심하게 고문받았고, 한쪽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블류헤르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아서 정식 재판없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그의 명성은 소련에서 대단하였기 때문에 그의 처형은 비밀이었고, 공식적으로는 중국에 파견되어 가명으로 활약하는 것처럼 대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죽음이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56년 흐루쇼프시절 그가 공식적으로 복권되었을 때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계속 인기있는 존재였고, 그와 그의 가족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나 책이 발표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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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데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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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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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오션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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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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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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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엘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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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성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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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엠 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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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십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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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도 제1009호선
지방도 제1009호선(거류 ~ 초전선)은 경상남도 고성군 거류면 당동삼거리와 진주시 초전동 농업기술원삼거리를 잇는 경상남도의 지방도이다. 진주시 동부의 읍면 지역을 관통하며, 고성군 구간에서는 통영대전고속도로가 미처 통과하지 못하는 고성군 중심을 통과하는 보조 간선 역할을 하고 있다. 진주시 초장동에서 금산면의 구간과 고성군 고성읍에서 통영시 광도면을 잇는 구간은 왕복 4차로, 나머지 구간은 왕복 2차로로 구성되어 있다. 진주시 문산읍의 문산 나들목에서 남해고속도로와, 고성군 영오면의 연화산 나들목과 거류면의 동고성 나들목에서 통영대전고속도로와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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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마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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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유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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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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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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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필
임혁필(1972년 3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화가이다. 생애. 대한민국 해병대 사병으로 복무한 그는 청주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96년 연극배우 첫 데뷔히였으며 이듬해 1997년 KBS 개그맨 13기 공채로 정식 데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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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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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파르트 (동음이의)
보나파르트의 다른 뜻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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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우엔훅